전 11번가 MD에서 육아용품 이커머스 창업까지, 왜 이 길을 택했나

전 11번가 MD에서 육아용품 이커머스 창업까지, 왜 이 길을 택했나

전 11번가 MD에서 육아용품 이커머스 창업까지, 왜 이 길을 택했나 시작은 분노였다 첫째 낳고 복직했다. 11번가 육아용품 MD로. 8년차였다. 회의실에서 기저귀 카테고리 전략 발표했다. 부장이 물었다. "김 대리, 본인도 쓰세요?" 웃으면서 답했다. "네, 저희 애가 지금 이거 쓰거든요." 그날 저녁. 아이 기저귀 갈다가 샜다. 새벽 2시. 빨래 돌리면서 생각했다. '아, 내가 회사에서 팔던 게 이거였구나.' 숫자로만 보던 상품이 손에 잡혔다. 판매량 15% 증가, 반품률 8%. 그 뒤에 새벽 2시 빨래하는 엄마가 있었다. 출근해서 기획서 뜯어고쳤다. 부장이 말했다. "너무 소비자 입장이야. 마진 생각해야지." 그때 알았다. 여긴 아니구나.11번가에서 배운 것들 8년이 짧진 않았다. 많이 배웠다. MD는 숫자 싸움이다. 마진율, 회전율, 재고율. 매일 엑셀과 씨름했다. 공급가 협상, 프로모션 기획, 경쟁사 분석. 머릿속이 계산기였다. 근데 엄마가 되니까 보였다. 숫자 뒤의 사람들. 판매 1위 물티슈. 20% 세일하면 주문 폭증. 근데 그 물티슈, 내가 써보니 너무 얇았다. 한 장에 두세 장 뽑게 돼. 결국 더 쓴다. 싸지 않다. 리뷰 1000개. 별점 4.5. 근데 악플 보면 '택배 박스 찢어져 옴', '배송 일주일 걸림'. 육아는 전쟁인데 일주일은 길다. 회의 때 말했다. "배송 개선하면 재구매율 오를 겁니다." 팀장이 답했다. "물류비 더 들어. 마진 줄어." 그래. 회사는 그렇게 돌아간다. 틀린 말 아니다. 근데 나는 이제 소비자였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둘째 낳고 퇴사했다 임신 7개월. 팀장이 불렀다. "승진 얘기 좀 하자." 앉았다. 배가 책상에 걸렸다. "김 대리 실력은 인정해. 근데 지금 둘째잖아. 과장 되면 출장도 많고, 야근도..." 말끝을 흐렸다. 물었다. "제 업무 성과에 문제 있었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요?" "솔직히 말하면, 애 둘 키우면서 과장 업무 소화 가능해?" 가능하냐고 물었다. 할 수 있냐가 아니라. 출산휴가 들어갔다. 복직 안 했다. 남편이 물었다. "후회 안 해?" 답했다. "잘 모르겠어. 근데 거기선 안 될 것 같았어." 둘째 백일 지나고 노트북 폈다. 밤 10시. 아이들 다 잤다. 에버노트에 썼다. '엄마들이 진짜 필요한 육아용품 쇼핑몰.' 구체적으로 적었다.배송 48시간 이내 보장 전 상품 엄마 MD가 직접 테스트 리뷰 조작 절대 금지 필요 없는 건 추천 안 함마지막 줄이 핵심이었다. '안 사도 되는 건 말해주기.' 마케팅 전략이 아니었다. 내가 필요했다. 창업은 무모했다 자본금 3000만원. 퇴직금이랑 예금 깼다. 남편이 물었다. "이거 망하면?" "모르겠어. 근데 해볼게." 시어머니 전화 왔다. "애들은 누가 키우려고." "낮에 봐주시잖아요." "내가 언제까지 봐주냐. 애 엄마가 집에 있어야지." 끊고 울었다. 화나서. 친정엄마는 달랐다. "해봐라. 안 되면 그때 생각하고." 사무실은 집 근처 공유오피스. 월 30만원. 혼자 시작했다. 첫 달 매출 120만원. 마진 15만원. 인건비 0원. 내가 다 했으니까. 포장, 발송, CS, 마케팅, 상품 소싱. 낮에 4시간, 밤에 3시간. 쪼개서 일했다. 둘째 어린이집 보내고 첫째 학교 보내면 10시. 오후 4시까지 집중. 애들 데리고 와서 저녁, 숙제. 9시 재우고 다시 시작. 새벽 1시까지. 체력이 바닥났다. 매일 피곤했다. 근데 이상했다. 행복했다.엄마 MD의 강점 6개월 지났다. 월매출 800만원. 상품 10개. 전부 내가 썼다. 아이들한테 썼다. 물티슈 3종 테스트했다. 제일 두껍고 촉촉한 거 골랐다. 단가 200원 비쌌다. 올렸다. 설명에 썼다. "한 장에 제대로 닦입니다. 두세 장 쓸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저렴합니다." 팔렸다. 재구매율 67%. 리뷰 왔다. "딱 이거였어요. 추천 감사합니다." 답글 달았다. "저희 애들도 써요. 좋죠?" 11번가에선 못 하던 대화였다. 고객이 아니라 동료였다. 같이 육아하는. 기저귀도 마찬가지. 흡수력 테스트했다. 밤 12시간 테스트. 새는 거 뺐다. 유명 브랜드였는데. 본사에서 전화 왔다. "왜 안 팔아요? 다른 데는 다 팔아요." 답했다. "테스트해봤는데 샜어요." "그래도 브랜드 파워가..." "저희 고객들 속일 순 없어요." 안 팔았다. 매출 포기했다. 근데 이상했다. 입소문 났다. '여기는 진짜만 판다.' MD 경력이 여기서 빛났다. 협상, 소싱, 마진 계산. 다 할 줄 알았다. 엄마 경험에 전문성 더했다. 대기업 MD들은 회의실에서 기획한다. 나는 집에서 실험했다. 아이한테 먹이고, 입히고, 써봤다. 경쟁력은 그거였다. 사용자이자 큐레이터. 1년 차, 직원 채용 매출 3000만원 넘었다. 혼자는 한계였다. 첫 직원 뽑았다. 29살 여성. 육아 경험 없었다. 면접 때 물었다. "왜 여기 지원했어요?" "저도 엄마 될 건데요. 배우고 싶어요." 뽑았다. 시작은 그거다. 마음. 가르쳤다. 상품 고르는 법, 리뷰 읽는 법, 엄마들 마음 읽는 법. "리뷰 100개 읽으면 보여요. 진짜 불편한 게 뭔지." 두 번째 직원은 육아맘이었다. 6살 아들. 오후 3시 퇴근 조건. 수락했다. "시간보다 집중력이에요. 3시까지 200% 일하면 돼요." 팀이 생겼다. 여자 5명. 전부 육아 관심 있거나 경험 있거나. 회의는 짧았다. 30분. 본론만. 애들 데리러 가야 하니까. 효율이 올랐다. 불필요한 회의 사라졌다. 워라밸이 생산성이었다. 11번가에선 9시까지 야근했다. 여기선 6시 칼퇴. 매출은 더 올랐다. 이유? 집중. 그리고 진짜 필요한 일만. 투자 유치의 벽 2년 차. 시리즈A 준비했다. IR 자료 만들었다. 밤 새웠다. 아이들 재우고. 투자사 10곳 미팅. 7곳 거절. 이유는 비슷했다. "시장 너무 작아요." "쿠팡이랑 어떻게 경쟁해요?" "마진이 낮은데요." 한 곳은 달랐다. 남자 파트너, 40대 후반. 물었다. "대표님, 아이 둘이시죠? 시간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솔직히 육아하면서 회사 키우기 힘들지 않나요?" 멈췄다. 숨 참았다. 웃었다. "그럼 남자 대표님들한테도 같은 질문 하세요?" "...그게 아니라, 워낙 바쁘시잖아요." "바쁜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불편한 침묵. 떨어졌다. 예상했다. 근데 하나 붙었다. 40대 여성 파트너. 미혼, 커리어우먼. "대표님 강점이 육아예요. 그게 경쟁력입니다. 15억 드릴게요." 울었다. 미팅룸에서. 참았는데 나왔다. "괜찮으세요?" "감사해서요." 투자 받았다. 15억. 조건 좋았다. 남편한테 전화했다. "됐어." "진짜?" "응, 울었어." "축하해." 저녁에 샴페인 샀다. 애들은 주스. 건배했다. "엄마 회사 커진대!" 딸이 물었다. "그럼 엄마 더 바빠져?" 할 말 없었다. "...응." "에이." 삐졌다. 미안했다. 근데 멈출 순 없었다. 3년 차, 팀 15명 사무실 옮겼다. 강남 위워크. 월 500만원. 팀 15명. 여성 12명. 육아맘 6명. 회의실 이름 지었다. '새벽', '낮잠', '칼퇴'. 웃겼다. 근데 진심이었다. 규칙 만들었다.아이 아프면 당연히 조퇴 학교 행사 참석 권장 재택 주 2회 가능 야근 금지직원이 물었다. "대표님은요?" "나?" "네, 대표님도 지키세요." 못 지켰다. 들켰다. 밤 11시 슬랙 메시지 보냈다가 혼났다. "대표님, 자야죠." 미안했다. 본이 안 됐다. 월매출 8000만원. 손익분기점 근처. 거의 왔다. 직원들이 말했다. "대표님, 우리 회사 좋아요." "뭐가?" "진짜 엄마들 생각해서 만든 거 같아요." 보람이었다. 돈보다. 근데 피곤했다. 매일 피곤했다. 체력이 문제였다. 38살. 20대처럼 안 됐다. 새벽 5시 기상. 밤 12시 취침. 7시간도 못 잤다. 허리 아팠다. 어깨 뭉쳤다. 병원 갈 시간 없었다. 남편이 말했다. "너 쓰러지겠어."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 싸웠다. 요즘 자주 싸웠다. "당신은 9시 퇴근하면 끝이잖아." "나도 힘들어." "나는 퇴근 없어. 집 와서도 일해." "그럼 회사 그만둬." "...뭐?" 할 말 없었다. 둘 다. 미안했다. 남편한테. 화풀이했다. 근데 그만둘 순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엄마이자 대표 딸 학예회 날. 캘린더에 3개월 전 블록해뒀다. 근데 투자사 미팅 잡혔다. 같은 날. 오후 2시. "날짜 변경 어려우세요?" 물었다. "네, 대표님 스케줄 맞추기 힘들어서요." 고민했다. 10분. 전화했다. "미안해, 딸. 엄마가..." "괜찮아, 엄마." 목소리 작았다. 괜찮지 않았다. 미팅 갔다. 집중 안 됐다. 머릿속은 학예회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울었다. 택시 기사 놀랐다. "손님, 괜찮으세요?" "네." 괜찮지 않았다. 집 왔다. 딸이 물었다. "엄마, 회사 재밌어?" "...응." "나보다?" 칼이었다. 가슴에 꽂혔다. "아니야. 너희가 제일 좋아." "근데 맨날 회사 가잖아." 할 말 없었다. 남편이 말했다. "애들이 이해할 거야." "언제?" "크면." 기다려야 했다. 애들이 크는 걸. 근데 그 시간은 안 돌아온다. 초등 2학년, 6살. 지금이 전부다. 죄책감 들었다. 매일. 엄마로서 부족하다고 느꼈다. 대표로서도 완벽하지 않았다. 둘 다 70%씩 하는 기분. 100%는 없었다. 여성 CEO 모임에서 말했다. "저만 이래요?" 다들 고개 끄덕였다. "나도 그래." "나도." 위로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근데 해결책은 없었다. 각자 버티는 거였다. 왜 이 길을 택했나 질문 받는다. 자주. "왜 창업했어요?" "대기업 다니면 편했을 텐데." 답은 간단하다. 안 편했다. 거기도. 11번가에서 배웠다. 시스템, 전략, 숫자. 엄마 되면서 배웠다. 진짜 필요한 것, 불필요한 것. 두 개 합쳤다. 전문성과 공감. 내가 만든 쇼핑몰은 내가 쓰고 싶은 곳이다. 엄마로서. 솔직한 추천, 빠른 배송, 진짜 리뷰. 당연한 건데 없었다. 그래서 만들었다. 쉽냐고? 아니다. 개 힘들다. 후회하냐고? 가끔. 딸 학예회 못 갈 때. 그만두고 싶냐고? 아니. 이상하다. 이렇게 힘든데 행복하다. 이유? 의미. 숫자 올리는 게 아니라 사람 돕는다. 나 같은 엄마들. 리뷰 읽으면 보인다. "덕분에 시간 아꼈어요." "믿고 삽니다." "추천이 진짜네요." 거기서 힘 얻는다. 새벽에 일어나는 이유. 대기업 MD 시절엔 없었다. 마진율 올려도 뿌듯함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매출 8000만원이 자랑스럽다. 우리가 도운 엄마가 8000명이니까. 직원들한테 말한다. "우리 회사는 엄마 편이야. 무조건." 마진 줄여서라도 빠르게 배송한다. 안 좋은 상품은 안 판다. 리뷰 조작 절대 안 한다. 손해 보냐고? 단기로는 맞다. 근데 길게 보면 이긴다. 신뢰니까. 남편이 물었다. "5년 뒤엔?" "모르겠어. 근데 계속할 거야." "힘들어도?" "응. 의미 있으니까." 시어머니는 아직도 이해 못 한다. "애들 크면 후회해." 모르겠다. 후회할지도. 근데 지금 이 순간. 내 선택은 이거다. 엄마인 대표. 대표인 엄마. 70%씩 하는. 완벽하진 않다. 근데 최선이다. 그걸로 됐다."이 길을 택한 건 편해서가 아니야. 의미 있어서지.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해."

캘린더에 아이 행사를 먼저 블록하고 투자자 미팅을 맞추는 방식

캘린더에 아이 행사를 먼저 블록하고 투자자 미팅을 맞추는 방식

캘린더에 아이 행사를 먼저 블록해놓는다 새벽 5시, 캘린더 정리 새벽 5시에 일어난다. 커피 내리고 노트북 연다. 제일 먼저 하는 건 구글 캘린더 열기. 3월 일정을 쭉 본다. 딸아이 학예회가 3월 15일 오전 10시. 아들 어린이집 소풍이 3월 22일. 부모 참관 수업이 3월 29일 오후 2시. 전부 빨간색으로 블록한다. "참석 필수"라고 메모 단다.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일정이다. 그다음 투자자 미팅 요청 메일을 본다. "3월 15일 어떠세요?" 안 된다. "3월 16일은 어떠신가요?" 답장 보낸다. 4년 전엔 반대였다. 아이 행사를 투자자 일정에 맞췄다. 학예회 날 회의 잡히면 남편한테 부탁했다. "미안, 내가 못 가. 대신 가줘." 지금은 아니다.투자자 미팅에서 들은 질문 작년 가을이었다. 시리즈A 투자 미팅이었다. 프레젠테이션 끝나고 질문 시간. 한 투자자가 물었다. "대표님, 아이 있으시죠? 학교 행사는 어떻게 하세요?" 순간 멈칫했다. 남자 창업가 선배한테 물어봤다. "형, 투자 미팅에서 아이 질문 받아봤어?" "아니, 한 번도." 나만 받는 질문이었다. "네, 둘 있습니다. 중요한 행사는 참석합니다." 웃으면서 답했다. 근데 속으로는 생각했다. '왜 이걸 물어보지?' 그 투자자는 투자 안 했다. 이유는 말 안 했다. 근데 느낌은 왔다. 여자 대표, 아이 둘, 시간 관리 안 될 거라는 판단. 말은 안 해도 느껴진다. 집에 와서 울었다. 남편한테 말했다. "나 왜 이래야 돼?" 남편이 말했다. "당신 잘못 없어. 그 사람이 편견 있는 거지." 맞다. 근데 그게 현실이다.3월 15일 학예회 딸아이 학예회 날이었다. 오전 10시 시작. 9시에 사무실 슬랙에 썼다. "오늘 오전 외근입니다. 12시쯤 복귀할게요." 팀장이 물었다. "혹시 급한 건 있으세요?" "없어요, 천천히 하세요." 학교 강당에 앉았다. 다른 엄마들이 많았다. 아빠는 셋. 딸아이가 무대에 올랐다. 합창 발표였다. 노래 부르면서 나를 찾았다. 눈이 마주쳤다. 손 흔들었다. 딸이 웃었다. 그 웃음이 전부였다. 공연 끝나고 교실로 갔다. 딸이 달려왔다. "엄마 왔어!" "응, 엄마 왔지."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요즘 엄마들 바쁘셔서... 와주셔서 감사해요." 미안한 말투였다. 나도 미안했다. 매번은 못 온다. 12시에 사무실 복귀했다. 오후 2시 투자자 화상 미팅. 3시 팀 회의. 5시 파트너사 콜. 저녁 7시에 퇴근했다. 딸이 현관에서 기다렸다. "엄마, 오늘 온 거 자랑했어." 그날 밤 일기장에 썼다. "오늘 학예회 갔다. 회사는 안 망했다. 딸은 웃었다. 둘 다 가능하다."누가 더 중요한지 고르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아이랑 회사 중 뭐가 더 중요해요?" 이상한 질문이다. 왜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 남자 CEO한테는 안 묻는다. "가족이랑 회사 중 뭐가 더 중요해요?" 당연히 둘 다 중요하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둘 다 중요하다. 방법의 문제다. 우선순위가 아니라 전략이다. 캘린더를 보면 내 가치관이 보인다. 빨간색 블록이 많으면 아이가 중요한 사람. 파란색 블록이 많으면 회사가 중요한 사람. 나는 빨간색이랑 파란색이 섞여 있다. 그게 내 삶이다. 아이 행사를 먼저 블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딸의 초등학교 2학년은 한 번뿐이다. 아들의 6살도 한 번뿐이다. 투자자는 기다려준다. 다음 주로 미룰 수 있다. 다른 날짜 제안할 수 있다. 급한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걸 먼저 블록해야 한다. 시어머니의 전화 지난주 시어머니한테 전화 왔다. "며느리, 회사 일 좀 줄여. 애들이 엄마가 필요해." 할 말이 없었다. "네, 알아요." 전화 끊고 남편한테 말했다. "당신 어머니한테 설명 좀 해줘." 남편이 말했다. "엄마가 옛날 사람이라서 그래. 이해해줘." 이해는 한다. 근데 힘들다. 시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평생 아이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했다. 그게 당연한 시대였다. 나는 다르다. 일하는 엄마다. 나쁜 엄마가 아니라 다른 엄마다. 딸한테 보여주고 싶다. 엄마도 꿈이 있다는 걸. 엄마도 일한다는 걸. 엄마도 성장한다는 걸. 아들한테도 보여주고 싶다. 여자도 CEO 한다는 걸. 엄마도 회의한다는 걸. 시어머니의 세대와 내 세대는 다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다. 근데 설명하기 힘들다. "며느리, 그래도 애 엄마잖아." 맞다. 나는 엄마다. 동시에 대표다. 둘 다 내 정체성이다. 친정엄마의 도움 친정엄마가 주 2회 아이들 봐준다. 화요일이랑 목요일. 엄마한테 미안하다. 환갑 넘었는데 손주 돌보느라 힘들다. "엄마, 미안해. 내가 회사 때문에..." "괜찮아, 손주들 보는 게 좋아." 엄마 말투는 담담하다. 근데 피곤한 얼굴이 보인다. 지난주 엄마한테 용돈 드렸다. "엄마, 이거 쓰세요." "아니야, 괜찮아." 받지 않았다. 기분 나빠한다. "내가 돈 받으려고 손주 보나?"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감사의 표현이다.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았다. 백화점 상품권. 엄마 좋아하는 화장품. 마사지 쿠폰. "엄마, 이건 선물이야. 받아줘." 그제야 받았다. 친정엄마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회사도, 육아도. 여자 CEO들 만나면 얘기 나온다. "친정 엄마 도움 받으세요?" 대부분 받는다. 남편 엄마는 도와주기 힘들다. 며느리한테 '일 그만두라'고 말한다. 친정 엄마는 다르다. 딸의 꿈을 응원한다. 한국 사회에서 워킹맘이 가능한 이유. 친정엄마의 헌신. 감사하다. 동시에 미안하다. 이게 정상은 아니다. 여성 CEO 모임에서 한 달에 한 번 여성 창업가 모임이 있다. 10명 정도 모인다. 지난달 모임에서 한 언니가 말했다. "나 이번에 투자 못 받았어. 아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 다들 고개 끄덕였다. 비슷한 경험들. "저도 비슷한 질문 받았어요." "저는 아예 임신 사실 숨겼어요." "애 낳고 복귀했더니 투자자가 놀라더라고요." 슬픈 얘기들이다. 근데 공감된다. 한 언니가 말했다. "우리가 선배가 돼줘야 돼. 후배들한테." 맞는 말이다. 롤모델이 없다. 아이 키우면서 회사 키운 여성 CEO가 드물다. 있어도 숨긴다. "아이요? 네, 있죠." 짧게 답하고 넘어간다. 약점으로 보일까봐. 나도 그랬다. 초기에는 아이 얘기 안 했다. 미팅에서 "주말에 뭐 하세요?" 물으면 "독서요" 라고 답했다. 진짜는 아이랑 놀이터 갔다. 근데 말 안 했다. 지금은 숨기지 않는다. "주말에 아이들이랑 시간 보냈어요." 당당하게 말한다. 약점이 아니다. 내 삶이다. 남편과의 대화 남편이랑 대화 시간이 부족하다. 요즘 서먹하다. 지난주 주말에 남편이 말했다. "우리 요즘 대화가 없어." 맞다. 아이들, 회사 얘기만 한다. 우리 얘기는 안 한다. "미안해. 내가 요즘 바빠서." "나도 바빠. 그래도 시간은 만드는 거잖아." 할 말이 없었다. 남편 말이 맞다. 남편은 대기업 과장이다. 야근 많다. 주말 출근도 한다. 근데 육아는 분담한다. 아침에 아이들 밥 먹인다. 설거지한다. 주말엔 아이들 축구 레슨 데려간다. 좋은 남편이다. 좋은 아빠다. 근데 우린 서먹하다. 결혼 10년차. 연애 감정은 사라졌다. 이제 동료 같다. 육아 동료, 생활 동료. 나쁜 건 아니다. 근데 허전하다. 지난주 금요일 밤에 제안했다. "우리 데이트할까?" "좋지, 언제?" 캘린더 봤다. 빈 시간이 없다. 3주 뒤 토요일 오후 3시. "3주 뒤?" 남편이 웃었다. "우리 데이트도 미팅이네." 웃프다. 근데 현실이다. 손익분기점 근처에서 회사는 잘 된다. 월 매출 8000만원. 손익분기점이 9000만원. 곧 도달한다. 1년 안에 가능하다. 직원들이 열심히 한다. 15명이 가족 같다. 여성 비율 80%. 워라밸을 강조한다. "칼퇴 하세요." "휴가 쓰세요." "육아휴직 당연하죠." 근데 나는 못 지킨다. 새벽에 일한다. 밤에 일한다. 주말에도 슬랙 확인한다. 팀장이 말했다. "대표님, 대표님도 쉬세요." "응, 괜찮아." 괜찮지 않다. 피곤하다. 늘 피곤하다. 지난달 건강검진 받았다. "스트레스 수치가 높네요. 피로도도 높고." "네, 알아요." 의사가 말했다. "좀 쉬세요." "네, 쉴게요." 거짓말이다. 못 쉰다. 회사가 손익분기점 넘어야 한다. 투자자한테 증명해야 한다. '여자 CEO도 된다'는 걸. '아이 있어도 된다'는 걸. 체력 관리의 실패 작년에 헬스장 등록했다. 3개월 끊었다. 세 번 갔다. 그리고 못 갔다. 요가 수업도 신청했다. 한 번 갔다. 시간이 없다. 새벽은 일해야 하고, 저녁은 아이들이고, 주말은 가족이고. 친구들이 말한다. "너 운동해야 해. 안 그러면 무너져." 안다. 근데 못 한다. 대신 영양제 먹는다. 비타민 C, 비타민 D, 오메가3, 철분제. 아침에 한 줌 먹는다. 이게 운동 대신이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다. 스트레스다. 살은 쪘다. 3kg. 운동 안 하고 야식 먹어서. 거울 보면 피곤해 보인다. 화장으로 가린다. 남편이 걱정한다. "당신 좀 쉬어." "응, 괜찮아." 거짓말이다. 안 괜찮다. 근데 멈출 수 없다. 딸아이의 질문 지난주 저녁이었다. 딸이 물었다. "엄마는 왜 맨날 바빠?" 뭐라고 답해야 할까. "엄마가 회사 다녀서 그래." "회사 그만두면 안 돼?" "그만두면 돈 못 벌잖아." "아빠 돈 있잖아." 순간 멈칫했다. "엄마도 일하고 싶어. 회사가 재밌거든." "나랑 노는 것보다?" 대답이 안 나왔다. 딸이 서운한 표정이었다. "엄마는 너랑 노는 것도 좋아하고, 회사도 좋아해. 둘 다야." "그럼 학교 행사 다 와줘." "...노력할게." 약속은 못 했다. 다 갈 수 없다. 딸이 방으로 들어갔다. 문 닫는 소리가 컸다. 남편이 말했다. "애가 서운한가봐." "나도 안다." 그날 밤 딸 방에 들어갔다. 이미 자고 있었다. 머리 쓰다듬었다. "미안해. 엄마가 부족해서." 자는 딸한테 속삭였다. 대답은 없었다. 아들의 담담함 아들은 다르다. 6살이라 그런지 덜 서운해한다. "엄마 회사 가?" "응, 가야 해." "그럼 할머니랑 놀게." 담담하다. 별로 신경 안 쓴다. 남편이 말했다. "아들은 아직 어려서 그래. 커지면 딸이랑 똑같을 거야." 불안하다. 나중에 아들도 서운해할까봐. 근데 지난주 아들이 그림 그렸다. 가족 그림. 나를 그렸다. 노트북 들고 있는 모습. "엄마는 항상 컴퓨터해." 아들의 설명. 웃프다. 아들이 기억하는 엄마는 노트북 든 모습. "엄마가 다음 주말엔 컴퓨터 안 할게. 우리 놀이동산 갈까?" "진짜?" 아들 눈이 반짝였다. "응, 진짜." 약속했다. 캘린더에 블록했다. 빨간색으로. "놀이동산 - 아들과 약속". 이번엔 지킬 거다. 우선순위가 아니라 전략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 일과 가정은 시소라고. 하나가 올라가면 하나가 내려간다고.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틀렸다. 시소가 아니다. 둘 다 올릴 수 있다. 방법의 문제다. 캘린더 블록이 그 방법이다. 중요한 걸 먼저 블록한다. 움직일 수 없는 일정을 먼저 잡는다. 아이 행사가 움직일 수 없다. 3월 15일 학예회는 3월 15일이다. 다른 날로 못 옮긴다. 투자자 미팅은 움직일 수 있다. 16일도 되고, 20일도 된다. 화상으로도 된다. 그러니까 아이 행사를 먼저 블록한다. 그다음 투자자 미팅을 맞춘다. 이게 우선순위가 아니다. 전략이다. 회사도 잘 되고, 아이도 챙긴다. 둘 다 가능하다. 힘들다. 피곤하다. 근데 불가능하진 않다. 완벽하진 않다. 딸은 가끔 서운해한다. 남편이랑은 가끔 서먹하다. 나는 늘 피곤하다. 근데 계속한다. 다른 방법을 모르니까. 4년 전과 지금 4년 전엔 달랐다. 회사 일정이 우선이었다. "투자자 미팅 있어서 못 가." 남편한테 부탁했다. 학예회, 소풍, 참관 수업. 딸이 물었다. "엄마는 왜 안 와?" "엄마가 바빠서."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잘 돼야 가족도 행복하니까. 틀렸다. 회사가 잘 돼도 딸의 서운함은 안 사라진다. 아들의 그림 속 엄마는 노트북 든 모습이다. 2년 전에 깨달았다. 딸의 생일날이었다. 케이크 자르는데 전화 왔다. 투자자였다. "대표님,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지금은 좀..." 딸이 쳐다봤다. "잠깐만요." 방으로 들어가서 통화했다. 20분 걸렸다. 나왔더니 케이크가 잘려 있었다. 딸이 울고 있었다. "엄마가 케이크 안 잘랐어." 남편이 대신 잘랐다. 그날 결심했다. 바꿔야겠다고. 지금은 다르다. 딸 생일에는 전화 안 받는다. 학예회에는 간다. 아들과의 약속은 지킨다. 회사는 안 망했다. 오히려 잘 된다. 투자자들도 이해한다. "다음 주로 미룰까요?" "네, 감사합니다." 문제없다. 여성 창업가 선배의 조언 작년에 만난 선배가 있다. 여성 CEO, 50대, 아이 둘 다 대학생. "후배님, 조언 하나 할게요." "네, 말씀하세요." "아이들은 금방 커요. 회사는 천천히 가도 돼요." 와닿지 않았다. 그때는. "회사가 빨리 커야 하지 않나요?" "왜요?" "투자자들 보여줘야 하잖아요." "투자자 인생 사세요? 본인 인생 사세요?" 할 말이 없었다. "저도 후배님처럼 했어요. 애들 학교 행사 못 갔어요. 회사 일정이 우선이었죠." "그래서요?" "후회해요. 지금도." 선배의 눈빛이 흔들렸다. "큰애가 작년에 말했어요. '엄마는 항상 안 왔잖아.' 대학생인데도 기억하더라고요." 무거운 침묵. "회사는 성공했어요. 매출 300억. 근데 아이들이랑은 서먹해요. 뭘 성공한 건지 모르겠어요." 그 말이 계속 맴돈다. 나는 선배처럼 안 되고 싶다. 회사만 성공하고 싶지 않다. 회사도 키우고, 아이도 키운다. 둘 다. 롤모델의 부재 여성 창업가 선배가 적다. 더 적은 건 아이 키우면서 성공한 선배. 찾아봤다. 한국에 몇 명 안 된다. 있어도 인터뷰에서 아이 얘기 안 한다. "개인적인 질문은 곤란합니다." 이해한다. 약점으로 보일까봐. 미국은 다르다. 셰릴 샌드버그가 아이 얘기 한다. "워킹맘은 죄책감과 싸운다"고 책에 썼다. 한국은 없다. 다들 숨긴다. 나는 숨기고 싶지 않다. 블로그에 쓴다. "오늘 학예회 갔다. 회사도 잘 돌아갔다." 댓글이 달린다. "저도 힘내요." "대표님처럼 하고 싶어요." "용기 나요." 후배들한테 보여주고 싶다. 가능하다고. 쉽지 않다. 힘들다. 피곤하다. 근데 가능하다. 완벽하진 않다. 자주 실수한다. 아이들한테 미안하다. 남편한테 미안하다. 직원들한테도 미안하다. 근데 계속한다. 멈추고 싶지 않다. 캘린더가 보여주는 것 내 구글 캘린더를 보면 내가 보인다. 빨간색 블록: 아이 행사, 가족 시간, 학교 행사. 파란색 블록: 투자자 미팅, 팀 회의, 파트너 미팅. 초록색 블록: 여성 CEO 모임, 개인 시간, 운동(실패). 빨간색이 제일

직원들에게 '워라밸 중요해요'라고 말하고 밤 10시에 노트북을 켜는 죄책감

직원들에게 '워라밸 중요해요'라고 말하고 밤 10시에 노트북을 켜는 죄책감

직원들에게 '워라밸 중요해요'라고 말하고 밤 10시에 노트북을 켜는 죄책감 오늘 또 거짓말했다 "다들 6시에 퇴근하세요. 워라밸이 가장 중요해요." 오늘 전체 회의에서 한 말이다. 15명 앞에서 웃으며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지금 시각 밤 10시 32분. 나는 노트북을 켰다.아이들 재우고 설거지 끝내고 빨래 돌리고. 이제야 내 시간이다. 슬랙 확인. 미읽은 메시지 47개. 이메일 83통. 내일 투자자 미팅 준비 덜 됐다. 재무제표 다시 봐야 한다. "워라밸이 가장 중요해요." 내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 거짓말쟁이. 우리 팀은 6시에 퇴근한다 우리 회사는 정말 6시에 퇴근한다. 15명 중 12명이 여성이다. 그중 7명이 엄마다. 다들 6시 되면 가방 챙긴다. "대표님 먼저 갈게요" 인사하고 나간다. 나는 웃으며 손 흔든다. "조심히 가세요." 좋다. 정말 좋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회사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곳. 엄마가 죄책감 안 느끼는 곳. 육아 때문에 눈치 안 보는 곳. 우리 회사 복지제도를 자랑하면 다들 부러워한다.육아휴직 1년 보장 재택근무 주 2회 아이 아플 때 당일 연차 가능 학교 행사 참석 적극 권장 생리휴가 눈치 제로정말 지킨다. 하나도 안 빈말이다. 그런데.정작 나는 밤 10시에 노트북을 켠다. 이중잣대일까 "대표님은 왜 그렇게 일하세요?" 두 달 전 MD팀장이 물었다. 밤 11시에 내가 보낸 슬랙 메시지를 보고. "아, 이건 그냥 생각나서 적어둔 거예요. 내일 봐도 돼요." 변명이었다. 그날 밤 나는 3시간 동안 경쟁사 분석했다. 마케팅 전략 수정했다. 다음 달 프로모션 기획 다시 짰다. 왜?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대표니까. 15명 월급 책임져야 하니까. 투자자한테 믿음 줘야 하니까. 그런데 어제 남편이 말했다. "당신, 직원들한테는 워라밸 강조하면서 본인은 왜 그래. 이중잣대 아니야?" 할 말이 없었다. 맞다. 이중잣대다. 나는 직원들한테는 "6시 퇴근 필수"라고 하면서, 나는 밤 10시부터 3시간씩 일한다. "일 생각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서, 나는 주말에도 슬랙 확인한다. "휴가 꼭 쓰세요"라고 하면서, 나는 작년에 연차 3일 썼다.거짓말쟁이다. 아니, 위선자다. 그런데 안 하면 밤 10시에 노트북 안 켜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다. 내일 투자자 미팅 준비 덜 된 채로 간다. 질문에 제대로 답 못 한다. 신뢰 떨어진다. 다음 투자 유치 어려워진다. 경쟁사 분석 안 한다. 시장 변화 놓친다. 우리 전략 뒤처진다. 매출 정체된다. 마케팅 기획 안 다듬는다. 완성도 떨어진다. 고객 반응 시들하다. 성과 안 나온다. 그럼? 직원들 월급 줄까. 투자자는 실망할까. 회사는 망할까. 이게 내 머릿속이다. 밤 10시마다. 그래서 켠다. 노트북을. 책임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표는 달라야 한다? 지난달 여성 CEO 모임에서 이 얘기를 했다. "나만 그래? 직원들한테는 워라밸 강조하면서 본인은 못 지키는 거." 7명 중 5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는 달라야죠." "우리가 안 하면 누가 해요." "직원들 퇴근시키려면 우리가 더 해야죠." 다들 비슷했다. 그런데 한 선배가 말했다. "그거 오래 못 가요. 나도 그랬어요. 3년 했더니 번아웃 왔어요. 입원했어요." 그 선배는 지금 월 2회 상담 받는다. 우울증 진단받았다. 회사는 잘 되는데 본인은 망가졌다. "직원들 워라밸 지키게 하려면, 대표도 지켜야 해요. 안 그러면 결국 다 무너져요." 그 말이 계속 맴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지켜? 오늘도 켰다 밤 10시 32분. 노트북 켰다. 아이들 자는 방 쪽을 본다. 조용하다. 남편도 벌써 잤다. 슬랙 열었다. 메시지 47개. 하나씩 읽는다. MD팀장: "내일 미팅 자료 완성했어요. 먼저 퇴근할게요 :)" 오후 6시 5분 메시지다. 마케팅팀 대리: "프로모션 초안 공유드려요. 내일 아침에 봐주세요!" 오후 5시 58분. 다들 제시간에 퇴근했다. 좋다. 나는 자료를 연다. 하나씩 본다. 수정사항 적는다. 피드백 정리한다. 시계를 본다. 11시 48분. 내일 아침 8시 반 출근이다. 6시간 후다. 커피 한 모금 마신다. 식었다. "워라밸이 가장 중요해요." 오늘 한 말이 또 떠오른다. 거짓말은 아니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직원들한테는. 그럼 나는? 나는? 나한테는 워라밸이 중요하지 않은가. 중요하다. 당연히 중요하다. 아이들이랑 더 놀고 싶다. 남편이랑 대화하고 싶다. 친구들 만나고 싶다. 드라마 보고 싶다. 책 읽고 싶다. 그런데. 대표니까. 15명 책임져야 하니까. 투자자 신뢰 지켜야 하니까. 엄마인데 일한다고 욕먹으니까 더 잘해야 하니까. 여자 대표라고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하니까. 이유는 많다. 핑계도 많다. 그런데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사는지. 직원이 물었다 일주일 전이었다. 신입 디자이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제가 봤을 때요. 대표님이 제일 워라밸 없으세요." 웃으며 넘겼다. "나는 괜찮아.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 애가 말했다. "그래도요. 저희가 보기엔 대표님도 사람인데.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요." 가슴이 뜨끔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말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그날 밤. 밤 10시에 노트북 켤 때. 그 애 말이 계속 맴돌았다. '대표님도 사람인데.' 맞다. 나도 사람이다. 그럼 나도 워라밸이 필요한 거 아닌가. 이중잣대 아니라 생존전략?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게 정말 이중잣대일까. 아니면 그냥 역할의 차이일까. 대표는 직원과 다르다. 책임이 다르다. 무게가 다르다. 직원들은 맡은 일 하면 된다. 대표는 모든 걸 신경 써야 한다. 직원들은 월급 받는다. 대표는 월급 줘야 한다. 그러니까 대표가 더 일하는 건 당연한 거다. 이중잣대가 아니라 역할의 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속이 편하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직원들한테는 "건강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그럼 내 건강은? 직원들한테는 "번아웃 오기 전에 쉬라"고 한다. 그럼 내 번아웃은? 직원들한테는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럼 내 가족은? 질문하면 할수록 답이 안 나온다. 남편의 한마디 어젯밤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 쓰러지면 회사도 끝나는 거 알아?" 화가 났다. "그러니까 안 쓰러지려고 관리하는 거잖아." "그게 관리야? 하루 5시간 자는 게?" 할 말이 없었다. 요즘 수면시간 평균 4시간 반이다. 새벽 5시 기상. 밤 12시 반 취침. 주말엔 조금 더 잔다. 6시간 정도. "직원들한테는 8시간 자라고 하잖아." 남편 말이 맞다. 우리 회사 복지에 '수면권 보장'도 있다. 저녁 9시 이후 업무 연락 금지. 그런데 나는? 나는 밤 11시에 메일 쓴다. "당신, 언젠가 후회할 거야. 아이들 크면." 남편의 마지막 말. 가슴에 박혔다. 딸아이가 그렸다 지난주 딸아이가 그림 그렸다. '우리 가족' 그림. 아빠는 크게 그렸다. 엄마는 작게 그렸다. 뒤에. 노트북 앞에. "엄마는 항상 이렇게 있잖아." 8살 아이 말이다. 웃으며 넘겼다. "엄마 일하는 거야. 우리 00이 먹고살려면." 그런데 그날 밤. 그 그림을 다시 봤다. 작은 엄마. 뒤에. 노트북 앞에. 울었다. 아무한테도 말 못 하고 혼자 울었다. "워라밸이 가장 중요해요." 오늘 직원들한테 한 말. 정작 내 딸은 엄마를 노트북 뒤 작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변명의 여지 그래도 변명하고 싶다. 나는 내가 선택했다. 창업을. 아무도 강요 안 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했다. 대표 하겠다고 한 것도 나다. 15명 책임지겠다고 한 것도 나다. 그러니 당연히 더 일해야 한다. 직원들은 다르다. 그들은 취직했다. 회사가 제공하는 조건에 동의하고 들어왔다. 나는 회사를 만들었다. 책임의 무게가 다르다. 그러니까 이건 이중잣대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이렇게 생각하면 또 속이 편하다. 그런데. 이게 진짜 내 생각일까? 아니면 그냥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걸까? 투자자가 물었다 두 달 전 시리즈A 투자 미팅에서였다. 50대 남자 투자자가 물었다. "대표님, 아이 둘 키우면서 회사 경영 가능하세요?" 남자 대표들한테는 절대 안 하는 질문이다. 웃으며 답했다. "네. 가능합니다.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서요." "밤에 아이들 돌보시느라 업무에 지장은 없으세요?" 또 웃으며 답했다. "전혀요. 오히려 더 효율적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지장 있다. 많이 있다. 효율적? 천만에. 늘 시간 부족하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면 투자 못 받는다. '여자는 역시 안 되네' 소리 듣는다. 그래서 거짓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투자 받은 15억을 생각하며 노트북을 켰다. 밤 10시에. 이게 여자 대표의 현실이다. 롤모델이 없다 가끔 찾아본다. '여성 대표 워라밸' '엄마 CEO 일과' '여자 창업가 육아' 검색해도 별로 안 나온다. 나오는 건 다 성공 스토리다. "아이 셋 키우면서 100억 매출" "육아와 경영 모두 잡은 슈퍼우먼" "완벽한 워라밸, ○○ 대표의 비결" 다 거짓말 같다. 아니, 진짜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과정은 안 나온다. 밤 10시에 노트북 켜는 얘기는 없다. 아이 재우고 우는 얘기는 없다. 시어머니한테 뭐라 들은 얘기는 없다. 다들 성공한 후의 말만 한다. 나는 그 과정이 궁금한데. 어떻게 버텼는지. 어떻게 안 무너졌는지. 그 얘기는 아무도 안 한다. 결국 답은 밤 10시 32분. 오늘도 노트북을 켰다. 이게 이중잣대인지, 책임감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직원들한테는 '워라밸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나는 못 지킨다. 거짓말쟁이 같다. 위선자 같다. 그런데. 안 하면 회사가 어떻게 될까. 15명은 어떻게 될까. 그 생각하면 또 켜게 된다. 노트북을. 어쩌면 이게 답인지도 모르겠다. 대표는 다르다. 선택한 길이 다르다. 책임이 다르다. 직원들은 워라밸 지키게 해주고, 나는 그 뒤에서 더 일한다. 이게 내가 선택한 방식이다. 좋은 방식인지는 모르겠다. 오래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직원들은 6시에 퇴근한다. 나는 밤 10시에 일한다. 이중잣대라고 해도 할 말 없다. 그래도 이렇게 산다. 오늘도, 내일도."워라밸이 가장 중요해요." 오늘도 이 말을 했다. 그리고 밤 10시에 노트북을 켰다. 언젠가는 바뀔까. 모르겠다. 지금은 이게 내 방식이다.

시어머니의 '회사 그만두고 애나 봐'라는 말 뒤에서 우는 날들

시어머니의 '회사 그만두고 애나 봐'라는 말 뒤에서 우는 날들

새벽 5시, 어제 밤 통화가 떠올랐다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이 생각났다. 시어머니 전화. "딸이 학예회 연습한대. 엄마가 안 봐주면 누가 봐." 그 뒤에 나온 말. "회사 그만두고 애나 봐. 돈은 아들이 벌면 되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10분. 남편은 코 골며 잔다. 저번 주에 '엄마한테 내가 말할게'라고 했던 사람. 아직도 말 안 했다.커피 내렸다. 첫 잔. 사랑이라는 이름의 칼 시어머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진짜로. 명절 때 반찬 10가지 싸주신다. "바쁠 텐데 챙겨 먹어라." 아이들 옷도 사주신다. 좋은 거. 딸 학원비도 대주신 적 있다. "손주 교육은 내가." 근데 그 뒤에 항상 붙는다. "그렇게 애들 놔두고 회사 다니는 게 낫니?" "초등학생 엄마가 어디 있어. 애 혼자 집에." "너 없으면 애들이 얼마나 외로운데." 사랑인 거 안다. 손주 걱정. 아들 걱정. 그것도 안다. 근데 왜 이렇게 아프지.작년 시리즈A 투자 받았을 때. 15억. 기사도 났다. 네이버 메인 떴다. 시어머니가 전화하셨다. "축하한다"가 아니라 "이제 그만하고 애들 봐도 되겠네." 그날 밤에 혼자 울었다. 남편 몰래. 화장실에서. 오늘 할 일: 아프지 않은 척 7시 반. 아이들 깨웠다. 딸이 눈 비비며 물었다. "엄마, 금요일 학예회 오지?" "응, 당연하지." 거짓말이다. 그날 투자자 미팅이 있다. 3개월 잡은 미팅. 못 간다. 아들 급식비 입금했다. 준비물 챙겼다. 딸 숙제 확인했다. 둘 다 껴안았다. 조금 더 오래. 등원 시키고 차에 탔다. 백미러로 내 얼굴 봤다. 다크서클. 어제 밤 운 흔적. 파운데이션 덧발랐다.사무실 도착. 8시 40분. "대표님 좀 밝아 보이는데요?"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응, 주말 잘 쉬었어." 또 거짓말. 선택과 희생 사이 어디쯤 점심 먹으면서 여성 CEO 모임 단톡 봤다. 언니 한 분이 썼다. "시댁에서 또 '애 키우는 게 일'이래. 5년 전에도 들었는데." 공감 이모티콘 15개. 우리 다 안다. 이게 사랑에서 나온 말이란 걸. 손주 사랑. 며느리 걱정. 아들 걱정. 다 안다. 근데 왜 '회사 그만두고'가 답일까. 남자 CEO들한테 누가 물어? "자녀분 있으시죠? 회사 그만두실 생각 없으세요?" 아무도 안 물어. 내 남편한테도 시어머니 안 물어보신다. "회사 그만두고 애 봐라." 안 하신다. 왜? 아들이니까. 3시. 팀 회의. 마케팅 팀장이 보고했다. "이번 달 매출 9200만. 목표 달성했습니다." 박수 쳤다. 진심으로 기뻤다. 회의 끝나고 팀장이 물었다. "대표님, 제가 육아휴직 쓰려는데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언제부터?" "다음 달요. 둘째 낳거든요." 축하했다. 복귀 날짜 함께 잡았다. 인수인계 계획 세웠다. 그 순간 생각했다. 나도 이런 배려 받고 싶다. 시댁에서. 저녁 7시, 다시 엄마가 되어 퇴근했다. 아이들 데리러 갔다. 학원, 어린이집. 딸이 차 타자마자 울었다. "오늘 친구가 '너네 엄마는 맨날 안 와'라고 했어." 심장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미안해. 엄마가... 금요일에 못 갈 것 같아. 그 대신 토요일에 놀이공원 갈까?" 딸이 고개 돌렸다. 집 도착. 저녁 차렸다. 냉장고에 시어머니가 해주신 반찬. 데웠다. 아이들이 물었다. "할머니 언제 와?" "이번 주말." "할머니한테 엄마 얘기할 거야. 맨날 없다고." 숨이 막혔다. 밤 10시, 혼자만의 시간 아이들 재웠다. 남편은 야근. 노트북 켰다. 내일 미팅 자료. 다음 주 투자 보고서. 채용 공고. 그러다 멈췄다. 웹서핑했다. '워킹맘 죄책감'. '시댁 갈등'. '일 그만둘까'. 검색했다. 글들을 읽었다. 다들 비슷했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시어머니한테 전화하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다. "저도 아이들 사랑해요. 제가 일하는 건 저를 위해서만이 아니에요. 아이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엄마도 꿈이 있다는 걸. 엄마도 일할 수 있다는 걸." 근데 안 했다. 왜냐면 알아. 시어머니는 이해 못 하신다. 그 세대는 그랬으니까. 아이 키우는 게 여자 일이었으니까.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다. 그걸 이해시키기엔 난 너무 지쳤다. 이건 선택이다, 희생이 아니라 새벽 12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생각했다. 내가 회사 그만두면 어떨까. 진짜로. 아이들 매일 챙길 수 있다. 학예회 다 갈 수 있다. 시어머니 잔소리 안 들을 수 있다. 남편이랑 싸울 일도 줄어든다. 근데. 내가 4년 동안 만든 것들. 15명의 직원들. 투자자들. 고객들. 다음 달 론칭 예정인 신규 서비스. 그리고 무엇보다. 거울 앞에 선 나. 명함 내미는 나. 미팅에서 발표하는 나. "이번 분기 목표 달성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나. 그 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건 선택이다. 희생이 아니다. 나는 일하는 엄마를 선택했다. 아이들을 버리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일 둘 다 선택한 거다. 힘들다. 맞다. 죄책감 든다. 맞다. 시댁 눈치 보인다. 맞다. 근데 후회하냐. 아니다. 딸이 크면 알 거다. 엄마가 왜 이렇게 살았는지. 아들도 알 거다. 여자도 일할 수 있다는 걸. 시어머니는 평생 모르실 수도 있다. 괜찮다. 이해받으려고 사는 게 아니니까. 내일 아침 5시 알람이 울릴 거다. 일어날 거다. 커피 내릴 거다. 노트북 열 거다. 아이들 깨울 거다. 아침 먹일 거다. 등원시킬 거다. 미팅 갈 거다. 직원들 만날 거다. 결정할 거다. 퇴근할 거다. 아이들 안을 거다. "미안해" 말할 거다. 또 울 거다. 밤에. 혼자. 그리고 내일도 일어날 거다. 왜냐면. 이게 내 인생이니까.시어머니의 말은 사랑이다. 근데 내 선택도 사랑이다. 다른 종류의.

학교 행사 날, 나만 빠진 사진을 보는 마음

학교 행사 날, 나만 빠진 사진을 보는 마음

학교 행사 날, 나만 빠진 사진을 보는 마음 오전 10시 17분 투자자 미팅 중이었다. 시리즈B 준비 때문에 만난 VC 파트너. 말 잘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준비한 자료 보며 고개 끄덕였다. "성장률이 좋네요. 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엄마였다. 사진 12장.딸아이가 달리기하는 모습. 빨간 모자 쓰고. 얼굴이 빨개서 모자랑 구분이 안 됐다. "죄송한데, 잠깐만요." 화장실 간다고 했다. 변기 뚜껑 덮고 앉아서 사진을 하나씩 넘겼다. 할머니 손 잡고 운동장 들어가는 사진. 친구들이랑 줄 서 있는 사진. 2등으로 들어오는 사진. 마지막 사진. 시상식. 은메달 목에 걸고 웃는 딸. 옆에 서 있는 건 엄마가 아니라 외할머니였다. "엄마 오면 보여준다고 메달 안 벗어ㅋㅋ 밥도 안 먹고 기다림" 친정엄마 톡이었다. 울었다. 5분. 엄마의 계산법 오늘 아침 6시에 계산했었다. 운동회 가면: 투자자 미팅 취소, 재조정 최소 2주 소요, 시리즈B 일정 전체가 밀림. 엄마 부탁하면: 딸이 서운해함, 내가 죄책감 느낌, 그래도 회사는 돌아감. 정답이 있는 문제였다. 근데 정답을 고르는 게 이렇게 아픈 줄 몰랐다.초등 1학년 때도 그랬다. 입학식. 2학년 학부모 참관 수업. 지난달 현장학습. 내가 간 행사: 입학식 1번. 끝. 다른 엄마들은 다 왔다. 전업주부도 있고, 직장인도 있었다. 근데 다들 왔다. 나만 못 갔다. 미팅으로 돌아와서 "괜찮으세요?" 투자자가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거짓말이었다. 그 사람이 말을 이었다. "아까 얘기 이어가자면, 창업가의 지속가능성이 중요하거든요. 대표님, 아이 있으시죠?" 또 이 질문. "네, 둘 있습니다." "아, 그럼 시간 관리가 쉽지 않으시겠네요. 육아랑 병행이..." 남자 대표한테는 안 하는 질문이었다. 지난달 만난 남자 창업가. 그 사람도 아이 둘이었다. 아무도 안 물었다. "잘하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참았다.오후 7시, 집 앞 현관문 열자마자 딸이 뛰어왔다. "엄마! 나 2등 했어!" 메달 목에 걸고 있었다. 아침에 건 그대로. "우와, 진짜? 엄마가 못 가서 미안해..." "괜찮아. 할머니가 있었어. 근데 엄마는 왜 못 왔어?" 일 때문이라고 할까. 회사 때문이라고 할까. "엄마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엄마 일이 나보다 중요해?" 7살짜리가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이 안 나왔다. 딸이 고개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엄마는 대표잖아. 할머니가 그랬어. 엄마는 멋진 일 한다고." 그 말에 또 울었다. 저녁 먹으면서도, 설거지하면서도. 밤 11시, 다이어리 오늘 미팅 결과는 나빴다. "좀 더 고민해보겠다"는 답을 들었다. 매출은 전월 대비 12% 올랐다. 나쁘지 않았다. 신규 제휴 건 2개가 성사 직전이었다. 팀원들 야근 없이 다 퇴근시켰다. 객관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근데. 딸의 운동회 사진을 다시 봤다. 12장 중에 나는 한 장도 없었다. 나쁜 엄마의 증거 여성 CEO 모임에서 들은 얘기. "우리는 선택하면 안 돼. 다 잘해야 해." 맞는 말이었다. 남편은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나가면 "육아 참여하는 좋은 아빠"였다. 나는 매일 아침 저녁 챙겨도 "애 놔두고 일만 하는 엄마"였다. 똑같이 창업해도 남자는 "도전하는 사업가", 나는 "애 두고 사업하는 엄마"였다. 기준이 달랐다. 시어머니가 명절 때 했던 말. "며느리가 회사를 다니면 애들이 불쌍하지." 친정엄마는 달랐다.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엄마가 도와줄게." 두 할머니, 두 세대, 두 가지 시선. 딸은 어떤 걸 보고 자랄까. 그래도 내일 아침에도 5시에 일어날 거다. 아이들 깨우고, 아침 먹이고, 등원시키고. 8시 반에 출근해서 미팅하고, 전략 짜고, 팀 이끌고. 저녁에 퇴근해서 저녁 먹이고, 숙제 봐주고, 재우고. 그리고 다시 노트북 열 거다. 이게 나쁜 엄마의 증거는 아닐 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딸이 자라서 엄마를 기억할 때. "우리 엄마는 운동회에 못 왔어"가 아니라 "우리 엄마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날 키웠어"였으면.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엄마 아닐까. 엄마 톡 자기 전에 친정엄마한테 톡 보냈다. "엄마, 오늘 고마워. 미안해." 1분 만에 답장 왔다. "미안할 거 없어. 넌 잘하고 있어. 은지 엄청 자랑스러워했어. 엄마 얘기 하루 종일 했다." 그 말이 위로가 됐다. 조금. 내일은 또 다른 날이 올 거다. 또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거다. 또 죄책감이 밀려올 거다. 근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는 대표고, 엄마고, 아내고, 딸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믿고 싶다.오늘 하루, 버텼다. 내일도 버틸 거다.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