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11번가 MD에서 육아용품 이커머스 창업까지, 왜 이 길을 택했나
- 05 Dec, 2025
전 11번가 MD에서 육아용품 이커머스 창업까지, 왜 이 길을 택했나
시작은 분노였다
첫째 낳고 복직했다. 11번가 육아용품 MD로. 8년차였다.
회의실에서 기저귀 카테고리 전략 발표했다. 부장이 물었다. “김 대리, 본인도 쓰세요?” 웃으면서 답했다. “네, 저희 애가 지금 이거 쓰거든요.”
그날 저녁. 아이 기저귀 갈다가 샜다. 새벽 2시. 빨래 돌리면서 생각했다.
‘아, 내가 회사에서 팔던 게 이거였구나.’
숫자로만 보던 상품이 손에 잡혔다. 판매량 15% 증가, 반품률 8%. 그 뒤에 새벽 2시 빨래하는 엄마가 있었다.
출근해서 기획서 뜯어고쳤다. 부장이 말했다. “너무 소비자 입장이야. 마진 생각해야지.”
그때 알았다. 여긴 아니구나.

11번가에서 배운 것들
8년이 짧진 않았다. 많이 배웠다.
MD는 숫자 싸움이다. 마진율, 회전율, 재고율. 매일 엑셀과 씨름했다. 공급가 협상, 프로모션 기획, 경쟁사 분석. 머릿속이 계산기였다.
근데 엄마가 되니까 보였다. 숫자 뒤의 사람들.
판매 1위 물티슈. 20% 세일하면 주문 폭증. 근데 그 물티슈, 내가 써보니 너무 얇았다. 한 장에 두세 장 뽑게 돼. 결국 더 쓴다. 싸지 않다.
리뷰 1000개. 별점 4.5. 근데 악플 보면 ‘택배 박스 찢어져 옴’, ‘배송 일주일 걸림’. 육아는 전쟁인데 일주일은 길다.
회의 때 말했다. “배송 개선하면 재구매율 오를 겁니다.” 팀장이 답했다. “물류비 더 들어. 마진 줄어.”
그래. 회사는 그렇게 돌아간다. 틀린 말 아니다.
근데 나는 이제 소비자였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둘째 낳고 퇴사했다
임신 7개월. 팀장이 불렀다. “승진 얘기 좀 하자.”
앉았다. 배가 책상에 걸렸다.
“김 대리 실력은 인정해. 근데 지금 둘째잖아. 과장 되면 출장도 많고, 야근도…” 말끝을 흐렸다.
물었다. “제 업무 성과에 문제 있었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요?” “솔직히 말하면, 애 둘 키우면서 과장 업무 소화 가능해?”
가능하냐고 물었다. 할 수 있냐가 아니라.
출산휴가 들어갔다. 복직 안 했다.
남편이 물었다. “후회 안 해?” 답했다. “잘 모르겠어. 근데 거기선 안 될 것 같았어.”
둘째 백일 지나고 노트북 폈다. 밤 10시. 아이들 다 잤다.
에버노트에 썼다. ‘엄마들이 진짜 필요한 육아용품 쇼핑몰.’
구체적으로 적었다.
- 배송 48시간 이내 보장
- 전 상품 엄마 MD가 직접 테스트
- 리뷰 조작 절대 금지
- 필요 없는 건 추천 안 함
마지막 줄이 핵심이었다. ‘안 사도 되는 건 말해주기.’
마케팅 전략이 아니었다. 내가 필요했다.
창업은 무모했다
자본금 3000만원. 퇴직금이랑 예금 깼다.
남편이 물었다. “이거 망하면?” “모르겠어. 근데 해볼게.”
시어머니 전화 왔다. “애들은 누가 키우려고.” “낮에 봐주시잖아요.” “내가 언제까지 봐주냐. 애 엄마가 집에 있어야지.”
끊고 울었다. 화나서.
친정엄마는 달랐다. “해봐라. 안 되면 그때 생각하고.”
사무실은 집 근처 공유오피스. 월 30만원. 혼자 시작했다.
첫 달 매출 120만원. 마진 15만원. 인건비 0원. 내가 다 했으니까.
포장, 발송, CS, 마케팅, 상품 소싱. 낮에 4시간, 밤에 3시간. 쪼개서 일했다.
둘째 어린이집 보내고 첫째 학교 보내면 10시. 오후 4시까지 집중. 애들 데리고 와서 저녁, 숙제. 9시 재우고 다시 시작. 새벽 1시까지.
체력이 바닥났다. 매일 피곤했다.
근데 이상했다. 행복했다.

엄마 MD의 강점
6개월 지났다. 월매출 800만원.
상품 10개. 전부 내가 썼다. 아이들한테 썼다.
물티슈 3종 테스트했다. 제일 두껍고 촉촉한 거 골랐다. 단가 200원 비쌌다. 올렸다.
설명에 썼다. “한 장에 제대로 닦입니다. 두세 장 쓸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저렴합니다.”
팔렸다. 재구매율 67%.
리뷰 왔다. “딱 이거였어요. 추천 감사합니다.”
답글 달았다. “저희 애들도 써요. 좋죠?”
11번가에선 못 하던 대화였다. 고객이 아니라 동료였다. 같이 육아하는.
기저귀도 마찬가지. 흡수력 테스트했다. 밤 12시간 테스트. 새는 거 뺐다. 유명 브랜드였는데.
본사에서 전화 왔다. “왜 안 팔아요? 다른 데는 다 팔아요.” 답했다. “테스트해봤는데 샜어요.” “그래도 브랜드 파워가…” “저희 고객들 속일 순 없어요.”
안 팔았다. 매출 포기했다.
근데 이상했다. 입소문 났다. ‘여기는 진짜만 판다.’
MD 경력이 여기서 빛났다. 협상, 소싱, 마진 계산. 다 할 줄 알았다. 엄마 경험에 전문성 더했다.
대기업 MD들은 회의실에서 기획한다. 나는 집에서 실험했다. 아이한테 먹이고, 입히고, 써봤다.
경쟁력은 그거였다. 사용자이자 큐레이터.
1년 차, 직원 채용
매출 3000만원 넘었다. 혼자는 한계였다.
첫 직원 뽑았다. 29살 여성. 육아 경험 없었다.
면접 때 물었다. “왜 여기 지원했어요?” “저도 엄마 될 건데요. 배우고 싶어요.”
뽑았다. 시작은 그거다. 마음.
가르쳤다. 상품 고르는 법, 리뷰 읽는 법, 엄마들 마음 읽는 법.
“리뷰 100개 읽으면 보여요. 진짜 불편한 게 뭔지.”
두 번째 직원은 육아맘이었다. 6살 아들. 오후 3시 퇴근 조건. 수락했다.
“시간보다 집중력이에요. 3시까지 200% 일하면 돼요.”
팀이 생겼다. 여자 5명. 전부 육아 관심 있거나 경험 있거나.
회의는 짧았다. 30분. 본론만. 애들 데리러 가야 하니까.
효율이 올랐다. 불필요한 회의 사라졌다. 워라밸이 생산성이었다.
11번가에선 9시까지 야근했다. 여기선 6시 칼퇴. 매출은 더 올랐다.
이유? 집중. 그리고 진짜 필요한 일만.
투자 유치의 벽
2년 차. 시리즈A 준비했다.
IR 자료 만들었다. 밤 새웠다. 아이들 재우고.
투자사 10곳 미팅. 7곳 거절.
이유는 비슷했다. “시장 너무 작아요.” “쿠팡이랑 어떻게 경쟁해요?” “마진이 낮은데요.”
한 곳은 달랐다. 남자 파트너, 40대 후반. 물었다.
“대표님, 아이 둘이시죠? 시간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솔직히 육아하면서 회사 키우기 힘들지 않나요?”
멈췄다. 숨 참았다. 웃었다.
“그럼 남자 대표님들한테도 같은 질문 하세요?”
”…그게 아니라, 워낙 바쁘시잖아요.”
“바쁜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불편한 침묵.
떨어졌다. 예상했다.
근데 하나 붙었다. 40대 여성 파트너. 미혼, 커리어우먼.
“대표님 강점이 육아예요. 그게 경쟁력입니다. 15억 드릴게요.”
울었다. 미팅룸에서. 참았는데 나왔다.
“괜찮으세요?” “감사해서요.”
투자 받았다. 15억. 조건 좋았다.
남편한테 전화했다. “됐어.” “진짜?” “응, 울었어.” “축하해.”
저녁에 샴페인 샀다. 애들은 주스. 건배했다.
“엄마 회사 커진대!” 딸이 물었다. “그럼 엄마 더 바빠져?”
할 말 없었다. ”…응.”
“에이.” 삐졌다.
미안했다. 근데 멈출 순 없었다.
3년 차, 팀 15명
사무실 옮겼다. 강남 위워크. 월 500만원.
팀 15명. 여성 12명. 육아맘 6명.
회의실 이름 지었다. ‘새벽’, ‘낮잠’, ‘칼퇴’. 웃겼다. 근데 진심이었다.
규칙 만들었다.
- 아이 아프면 당연히 조퇴
- 학교 행사 참석 권장
- 재택 주 2회 가능
- 야근 금지
직원이 물었다. “대표님은요?” “나?” “네, 대표님도 지키세요.”
못 지켰다. 들켰다.
밤 11시 슬랙 메시지 보냈다가 혼났다. “대표님, 자야죠.”
미안했다. 본이 안 됐다.
월매출 8000만원. 손익분기점 근처. 거의 왔다.
직원들이 말했다. “대표님, 우리 회사 좋아요.” “뭐가?” “진짜 엄마들 생각해서 만든 거 같아요.”
보람이었다. 돈보다.
근데 피곤했다. 매일 피곤했다.
체력이 문제였다. 38살. 20대처럼 안 됐다.
새벽 5시 기상. 밤 12시 취침. 7시간도 못 잤다.
허리 아팠다. 어깨 뭉쳤다. 병원 갈 시간 없었다.
남편이 말했다. “너 쓰러지겠어.”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
싸웠다. 요즘 자주 싸웠다.
“당신은 9시 퇴근하면 끝이잖아.” “나도 힘들어.” “나는 퇴근 없어. 집 와서도 일해.”
“그럼 회사 그만둬.” ”…뭐?”
할 말 없었다. 둘 다.
미안했다. 남편한테. 화풀이했다.
근데 그만둘 순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엄마이자 대표
딸 학예회 날. 캘린더에 3개월 전 블록해뒀다.
근데 투자사 미팅 잡혔다. 같은 날. 오후 2시.
“날짜 변경 어려우세요?” 물었다. “네, 대표님 스케줄 맞추기 힘들어서요.”
고민했다. 10분.
전화했다. “미안해, 딸. 엄마가…”
“괜찮아, 엄마.” 목소리 작았다. 괜찮지 않았다.
미팅 갔다. 집중 안 됐다. 머릿속은 학예회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울었다. 택시 기사 놀랐다. “손님, 괜찮으세요?”
“네.” 괜찮지 않았다.
집 왔다. 딸이 물었다. “엄마, 회사 재밌어?” ”…응.” “나보다?”
칼이었다. 가슴에 꽂혔다.
“아니야. 너희가 제일 좋아.” “근데 맨날 회사 가잖아.”
할 말 없었다.
남편이 말했다. “애들이 이해할 거야.” “언제?” “크면.”
기다려야 했다. 애들이 크는 걸.
근데 그 시간은 안 돌아온다. 초등 2학년, 6살. 지금이 전부다.
죄책감 들었다. 매일.
엄마로서 부족하다고 느꼈다. 대표로서도 완벽하지 않았다.
둘 다 70%씩 하는 기분. 100%는 없었다.
여성 CEO 모임에서 말했다. “저만 이래요?”
다들 고개 끄덕였다. “나도 그래.” “나도.”
위로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근데 해결책은 없었다. 각자 버티는 거였다.
왜 이 길을 택했나
질문 받는다. 자주.
“왜 창업했어요?” “대기업 다니면 편했을 텐데.”
답은 간단하다. 안 편했다. 거기도.
11번가에서 배웠다. 시스템, 전략, 숫자.
엄마 되면서 배웠다. 진짜 필요한 것, 불필요한 것.
두 개 합쳤다. 전문성과 공감.
내가 만든 쇼핑몰은 내가 쓰고 싶은 곳이다. 엄마로서.
솔직한 추천, 빠른 배송, 진짜 리뷰. 당연한 건데 없었다.
그래서 만들었다.
쉽냐고? 아니다. 개 힘들다.
후회하냐고? 가끔. 딸 학예회 못 갈 때.
그만두고 싶냐고? 아니.
이상하다. 이렇게 힘든데 행복하다.
이유? 의미.
숫자 올리는 게 아니라 사람 돕는다. 나 같은 엄마들.
리뷰 읽으면 보인다.
“덕분에 시간 아꼈어요.” “믿고 삽니다.” “추천이 진짜네요.”
거기서 힘 얻는다. 새벽에 일어나는 이유.
대기업 MD 시절엔 없었다. 마진율 올려도 뿌듯함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매출 8000만원이 자랑스럽다. 우리가 도운 엄마가 8000명이니까.
직원들한테 말한다.
“우리 회사는 엄마 편이야. 무조건.”
마진 줄여서라도 빠르게 배송한다. 안 좋은 상품은 안 판다. 리뷰 조작 절대 안 한다.
손해 보냐고? 단기로는 맞다.
근데 길게 보면 이긴다. 신뢰니까.
남편이 물었다. “5년 뒤엔?” “모르겠어. 근데 계속할 거야.” “힘들어도?” “응. 의미 있으니까.”
시어머니는 아직도 이해 못 한다. “애들 크면 후회해.”
모르겠다. 후회할지도.
근데 지금 이 순간. 내 선택은 이거다.
엄마인 대표. 대표인 엄마. 70%씩 하는.
완벽하진 않다. 근데 최선이다.
그걸로 됐다.
“이 길을 택한 건 편해서가 아니야. 의미 있어서지.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