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가 물었다: '아이 둘이 있으시는데, 시간이 괜찮으세요?'
- 02 Dec, 2025
투자자가 물었다
시리즈A 미팅. 10시 정각.
투자사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김대표님. 아이 둘이 있으시는데, 시간이 괜찮으세요?”
나는 웃음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네, 시스템을 잘 만들어놨어요. 팀에 믿을만한 리더들이 있고요.”
투자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은 여전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남자 CEO도 아이 있는 사람 많다. 김OO, 박OO… 다들 둘, 셋 있다. 근데 누가 걔넘한테 ‘시간 괜찮으세요?‘라고 묻나. 묻는 사람 본 적 없다.
나는 왜 이 질문을 받는 건가.
엄마니까? 창업가이기 전에 엄마라는 전제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고, 그래서 투자할 가치가 낮다는 거인가.

처음 받은 질문은 아니었다
작년 상반기 시드 라운드. 다른 투자사였다. “육아는 어떻게 하세요? 회사 성장하면 시간이 더 부족해질 텐데.”
그다음 년도. 또 다른 투자자. “팀원 중에 엄마들이 많으신데, 야근이나 주말 출근 할 때 괜찮아요?”
패턴이 보였다.
나는 여성 창업가 네트워크에 물었다. 모두가 같은 경험을 했다. 신혜경 대표는 “넷 중 셋이 애 있다고 했을 때 투자 수익률이 떨어진다는 얘기까지 들었어”라고 했다. 한수정 대표는 “인터뷰 때 ‘아, 그럼 아빠 도와줄 사람이 있으세요?‘라고 물어서 웃다가 화났어”라고 했다.
남자 CEO들은 안 받는 질문이다.

그 밤 노트북 앞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밤 11시. 노트북을 켰다.
투자자 이메일을 다시 읽었다. 투자 조건들. 실적 목표. 마일스톤. 다 이해했다. 근데 그 질문이 자꾸 떠올랐다.
‘시간이 괜찮으세요?’
이 질문 뒤에는 뭐가 숨어있나.
첫 번째: 너는 일을 제대로 못 할 거라는 의심. 두 번째: 아이들 때문에 회사를 팽개칠 거라는 예상. 세 번째: 여자는 결국 엄마 역할을 우선시한다는 선입견.
나는 지금 딸 학교 운동회를 못 갔다. 아들 첫 한글 수업도 못 했다. 남편 보고 ‘다녀와’라고 했다. 미안함도 죄책감도 있었다. 근데 그렇다고 나는 회사를 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생각한다.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서핑한다. 마케팅 데이터. 경쟁사 분석. 신입 이직 이유. 일요일 아침에 몰래 슬랙을 본다. 직원 메시지. 클레임. 솔루션.
나는 엄마이면서 동시에 회사를 위해 시간을 낸다. 그런데 투자자는 이 둘을 배타적으로 본다.
내가 엄마라는 건, 내가 경영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인가.

통계와 현실 사이
나는 찾아봤다. 여성 창업가 자금 조달 통계.
한국 스타트업 투자 중 여성 창업가 비율: 8%. 전년도 대비 감소했다. 감소했다.
여성 창업가 중 자녀 있는 경우: 70%. 그 중 시리즈A 이상 자금 조달에 성공한 비율: 22%.
남성 창업가 중 자녀 있는 경우: 65%. 그 중 시리즈A 이상 자금 조달: 58%.
숫자는 말한다. 너무 명확하게.
투자자는 남자 CEO가 일과 가정을 병행해도 그걸 ‘효율성’이라고 부른다. 여자 CEO가 하면 ‘시간 관리 능력’을 의심한다. 같은 행동인데 다르게 평가된다.
내 동생 남편은 대기업 임원이다. 아이 셋 있다. 누가 그 사람한테 ‘시간 괜찮으세요?‘라고 물어본 적 없다. 오히려 ‘와, 잘하시네요’라고 한다. 똑같이 아이를 낳았고, 똑같이 일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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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뭐라고 대답했나
미팅 때로 돌아가자.
투자자: “아이 둘이 있으시는데, 시간이 괜찮으세요?”
내 대답: “네, 시스템을 잘 만들어놨어요. 팀에 믿을만한 리더들이 있고요.”
솔직한 대답이었나? 아니다.
진짜 대답은 이거였어야 한다.
“시간이 부족하죠. 근데 그건 제 경영 능력의 증거입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 성과를 내는 법을 배웠거든요. 현재 월 매출 8000만원. 손익분기점 근접. 직원 만족도 4.7점. 이 수치들이 제 시간 관리 능력을 말해주지 않나요?”
근데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 방어적으로 들릴까봐. 겁냈다. 혹시 ‘쓸데없는 감정섞은 대답’이라고 느껴질까봐. 여자라는 이유로 더 따져질까봐.
그래서 웃으며 둘러댔다. “시스템이 있어요.”
나약했나. 그럼 뭐 어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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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혼자 정리해야 했다
투자를 받긴 받았다. 15억. 조건은 통과했다.
근데 그 질문은 남아있다.
나는 생각한다. 이게 내 문제인가, 투자자의 문제인가.
둘 다다. 내 문제는 내가 이 질문을 받을 때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다는 것. 투자자의 문제는 여전히 여자는 시간이 부족할 거라고 가정한다는 것.
근데 바꿀 수 있는 건 뭔가.
나는 투자자를 바꿀 수 없다. 투자자는 구사정(舊思定)에 빠져있다. 여자+엄마=업무 능력 저하. 이 공식은 그들 머리에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 자신을 명확하게 만드는 것이다.
숫자로. 성과로. 팀의 만족도로. 재투자율로.
그래서 맡은 일을 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난다. 아이들 등원시킨 후 출근한다. 점심은 미팅으로 해결한다. 저녁 7시 퇴근해서 아이 봐준다. 밤 10시 다시 일을 한다.
이건 포기가 아니다. 이건 선택이다.
투자자가 의심해도, 시어머니가 뭐라고 해도, 나는 안다. 내가 뭐를 하고 있고, 왜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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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미팅 다음 주에 투자자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혹시 시간 때문에 경영 체계 구축할 때 고민 있으신 분 있으신가요? 우리가 외부 경영 컨설턴트 지원해주고 싶어서요.”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좋은 제안인가, 내 능력을 의심하는 건가.
여성 CEO 모임에서 물어봤다.
신혜경 대표가 웃었다. “아, 그건 투자자 나름의 성장이야. 최소한 의식은 했단 거지.”
맞다. 그게 뭐든 간에, 투자자가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한 거다. 내 대답이 뭔지는 몰라도.
나는 컨설턴트를 받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답장을 썼다.
“감사합니다. 저희는 현재 경영 체계가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직원 50명, 100명으로 늘어날 때 그런 지원이 필요하면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이메일. 명확한 톤. 나는 감사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는 신호.
투자자는 3일 후에 답변을 보냈다.
“좋습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 응원합니다.”
응원한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투자 후 발생할 리스크에 대한 사전 대비인지는 모른다. 근데 뭐 상관인가.
나는 여기 있고, 일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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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답하자면
투자자가 물었던 “시간이 괜찮으세요?”에 대한 진짜 대답은 이거다.
시간이 부족하다. 매우.
아이들이랑 시간도 부족하다. 남편이랑 대화할 시간도 없다. 운동할 시간, 친구 만날 시간, 책 읽을 시간. 다 부족하다.
근데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직원들도 비슷하다. 강지은(27)은 엄마 아파서 주말마다 시골 내려간다. 박은영(32)은 아직 결혼 못 했는데, 회사에서는 그걸 왜 못 했냐고 은근히 묻는다. 신수영(35)은 ‘아이 두 명 있으니까 야근 빼달라’는 제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게 여자라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나는 직원들한테 ‘워라밸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근데 나는 지키지 않는다. 이게 가장 큰 모순이다.
투자자가 나한테 물었던 질문을. 나는 내 직원들한테는 절대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안다. 이 질문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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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다음 투자자 미팅이 있다. 내일 2시.
이번엔 다른 투자사다. 사람도 다르다.
혹시 또 같은 질문을 받을까.
받으면 어떻게 할까.
그땐 답할 거다. 명확하게.
“시간은 부족합니다. 근데 저는 그 부족한 시간을 전략으로 채웠습니다. 현재 저희 팀의 생산성은 업계 평균 140% 입니다. 직원 1인당 매출은 5300만원. 마진율은 32%. 이게 제 시간 부족함을 증명하지 않나요? 오히려 이게 제 능력을 증명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덧붙일 거다.
“아, 그리고. 이 질문이 필요하신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혹시 시간이 부족하면 회사가 망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대기업 임원들은 대부분 아이가 있는데요. 그분들한테는 같은 질문을 안 하시죠?”
아, 근데 이건 너무 공격적이겠다.
그냥 이렇게 하자.
“시간이 부족하면 효율적이 되거든요. 그게 저한테 준 가장 큰 자산입니다.”
웃으면서. 자신 있게.
밤 11시 30분. 아이들은 자고 남편은 소파에 누워있다. 나는 여전히 노트북 켜있다. 내일 피칭 준비. 그 투자자는 누군지, 어떤 포트폴리오가 있는지, 어떤 점이 중요한지. 모두 찾아봤다.
시간은 부족하다. 근데 나는 계속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