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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 03 Dec, 2025
시어머니의 '회사 그만두고 애나 봐'라는 말 뒤에서 우는 날들
새벽 5시, 어제 밤 통화가 떠올랐다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이 생각났다. 시어머니 전화. "딸이 학예회 연습한대. 엄마가 안 봐주면 누가 봐." 그 뒤에 나온 말. "회사 그만두고 애나 봐. 돈은 아들이 벌면 되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10분. 남편은 코 골며 잔다. 저번 주에 '엄마한테 내가 말할게'라고 했던 사람. 아직도 말 안 했다.커피 내렸다. 첫 잔. 사랑이라는 이름의 칼 시어머니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진짜로. 명절 때 반찬 10가지 싸주신다. "바쁠 텐데 챙겨 먹어라." 아이들 옷도 사주신다. 좋은 거. 딸 학원비도 대주신 적 있다. "손주 교육은 내가." 근데 그 뒤에 항상 붙는다. "그렇게 애들 놔두고 회사 다니는 게 낫니?" "초등학생 엄마가 어디 있어. 애 혼자 집에." "너 없으면 애들이 얼마나 외로운데." 사랑인 거 안다. 손주 걱정. 아들 걱정. 그것도 안다. 근데 왜 이렇게 아프지.작년 시리즈A 투자 받았을 때. 15억. 기사도 났다. 네이버 메인 떴다. 시어머니가 전화하셨다. "축하한다"가 아니라 "이제 그만하고 애들 봐도 되겠네." 그날 밤에 혼자 울었다. 남편 몰래. 화장실에서. 오늘 할 일: 아프지 않은 척 7시 반. 아이들 깨웠다. 딸이 눈 비비며 물었다. "엄마, 금요일 학예회 오지?" "응, 당연하지." 거짓말이다. 그날 투자자 미팅이 있다. 3개월 잡은 미팅. 못 간다. 아들 급식비 입금했다. 준비물 챙겼다. 딸 숙제 확인했다. 둘 다 껴안았다. 조금 더 오래. 등원 시키고 차에 탔다. 백미러로 내 얼굴 봤다. 다크서클. 어제 밤 운 흔적. 파운데이션 덧발랐다.사무실 도착. 8시 40분. "대표님 좀 밝아 보이는데요?"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응, 주말 잘 쉬었어." 또 거짓말. 선택과 희생 사이 어디쯤 점심 먹으면서 여성 CEO 모임 단톡 봤다. 언니 한 분이 썼다. "시댁에서 또 '애 키우는 게 일'이래. 5년 전에도 들었는데." 공감 이모티콘 15개. 우리 다 안다. 이게 사랑에서 나온 말이란 걸. 손주 사랑. 며느리 걱정. 아들 걱정. 다 안다. 근데 왜 '회사 그만두고'가 답일까. 남자 CEO들한테 누가 물어? "자녀분 있으시죠? 회사 그만두실 생각 없으세요?" 아무도 안 물어. 내 남편한테도 시어머니 안 물어보신다. "회사 그만두고 애 봐라." 안 하신다. 왜? 아들이니까. 3시. 팀 회의. 마케팅 팀장이 보고했다. "이번 달 매출 9200만. 목표 달성했습니다." 박수 쳤다. 진심으로 기뻤다. 회의 끝나고 팀장이 물었다. "대표님, 제가 육아휴직 쓰려는데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언제부터?" "다음 달요. 둘째 낳거든요." 축하했다. 복귀 날짜 함께 잡았다. 인수인계 계획 세웠다. 그 순간 생각했다. 나도 이런 배려 받고 싶다. 시댁에서. 저녁 7시, 다시 엄마가 되어 퇴근했다. 아이들 데리러 갔다. 학원, 어린이집. 딸이 차 타자마자 울었다. "오늘 친구가 '너네 엄마는 맨날 안 와'라고 했어." 심장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미안해. 엄마가... 금요일에 못 갈 것 같아. 그 대신 토요일에 놀이공원 갈까?" 딸이 고개 돌렸다. 집 도착. 저녁 차렸다. 냉장고에 시어머니가 해주신 반찬. 데웠다. 아이들이 물었다. "할머니 언제 와?" "이번 주말." "할머니한테 엄마 얘기할 거야. 맨날 없다고." 숨이 막혔다. 밤 10시, 혼자만의 시간 아이들 재웠다. 남편은 야근. 노트북 켰다. 내일 미팅 자료. 다음 주 투자 보고서. 채용 공고. 그러다 멈췄다. 웹서핑했다. '워킹맘 죄책감'. '시댁 갈등'. '일 그만둘까'. 검색했다. 글들을 읽었다. 다들 비슷했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시어머니한테 전화하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다. "저도 아이들 사랑해요. 제가 일하는 건 저를 위해서만이 아니에요. 아이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엄마도 꿈이 있다는 걸. 엄마도 일할 수 있다는 걸." 근데 안 했다. 왜냐면 알아. 시어머니는 이해 못 하신다. 그 세대는 그랬으니까. 아이 키우는 게 여자 일이었으니까.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다. 그걸 이해시키기엔 난 너무 지쳤다. 이건 선택이다, 희생이 아니라 새벽 12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생각했다. 내가 회사 그만두면 어떨까. 진짜로. 아이들 매일 챙길 수 있다. 학예회 다 갈 수 있다. 시어머니 잔소리 안 들을 수 있다. 남편이랑 싸울 일도 줄어든다. 근데. 내가 4년 동안 만든 것들. 15명의 직원들. 투자자들. 고객들. 다음 달 론칭 예정인 신규 서비스. 그리고 무엇보다. 거울 앞에 선 나. 명함 내미는 나. 미팅에서 발표하는 나. "이번 분기 목표 달성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나. 그 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건 선택이다. 희생이 아니다. 나는 일하는 엄마를 선택했다. 아이들을 버리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일 둘 다 선택한 거다. 힘들다. 맞다. 죄책감 든다. 맞다. 시댁 눈치 보인다. 맞다. 근데 후회하냐. 아니다. 딸이 크면 알 거다. 엄마가 왜 이렇게 살았는지. 아들도 알 거다. 여자도 일할 수 있다는 걸. 시어머니는 평생 모르실 수도 있다. 괜찮다. 이해받으려고 사는 게 아니니까. 내일 아침 5시 알람이 울릴 거다. 일어날 거다. 커피 내릴 거다. 노트북 열 거다. 아이들 깨울 거다. 아침 먹일 거다. 등원시킬 거다. 미팅 갈 거다. 직원들 만날 거다. 결정할 거다. 퇴근할 거다. 아이들 안을 거다. "미안해" 말할 거다. 또 울 거다. 밤에. 혼자. 그리고 내일도 일어날 거다. 왜냐면. 이게 내 인생이니까.시어머니의 말은 사랑이다. 근데 내 선택도 사랑이다. 다른 종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