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학교

학교 행사 날, 나만 빠진 사진을 보는 마음

학교 행사 날, 나만 빠진 사진을 보는 마음

학교 행사 날, 나만 빠진 사진을 보는 마음 오전 10시 17분 투자자 미팅 중이었다. 시리즈B 준비 때문에 만난 VC 파트너. 말 잘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준비한 자료 보며 고개 끄덕였다. "성장률이 좋네요. 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엄마였다. 사진 12장.딸아이가 달리기하는 모습. 빨간 모자 쓰고. 얼굴이 빨개서 모자랑 구분이 안 됐다. "죄송한데, 잠깐만요." 화장실 간다고 했다. 변기 뚜껑 덮고 앉아서 사진을 하나씩 넘겼다. 할머니 손 잡고 운동장 들어가는 사진. 친구들이랑 줄 서 있는 사진. 2등으로 들어오는 사진. 마지막 사진. 시상식. 은메달 목에 걸고 웃는 딸. 옆에 서 있는 건 엄마가 아니라 외할머니였다. "엄마 오면 보여준다고 메달 안 벗어ㅋㅋ 밥도 안 먹고 기다림" 친정엄마 톡이었다. 울었다. 5분. 엄마의 계산법 오늘 아침 6시에 계산했었다. 운동회 가면: 투자자 미팅 취소, 재조정 최소 2주 소요, 시리즈B 일정 전체가 밀림. 엄마 부탁하면: 딸이 서운해함, 내가 죄책감 느낌, 그래도 회사는 돌아감. 정답이 있는 문제였다. 근데 정답을 고르는 게 이렇게 아픈 줄 몰랐다.초등 1학년 때도 그랬다. 입학식. 2학년 학부모 참관 수업. 지난달 현장학습. 내가 간 행사: 입학식 1번. 끝. 다른 엄마들은 다 왔다. 전업주부도 있고, 직장인도 있었다. 근데 다들 왔다. 나만 못 갔다. 미팅으로 돌아와서 "괜찮으세요?" 투자자가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거짓말이었다. 그 사람이 말을 이었다. "아까 얘기 이어가자면, 창업가의 지속가능성이 중요하거든요. 대표님, 아이 있으시죠?" 또 이 질문. "네, 둘 있습니다." "아, 그럼 시간 관리가 쉽지 않으시겠네요. 육아랑 병행이..." 남자 대표한테는 안 하는 질문이었다. 지난달 만난 남자 창업가. 그 사람도 아이 둘이었다. 아무도 안 물었다. "잘하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참았다.오후 7시, 집 앞 현관문 열자마자 딸이 뛰어왔다. "엄마! 나 2등 했어!" 메달 목에 걸고 있었다. 아침에 건 그대로. "우와, 진짜? 엄마가 못 가서 미안해..." "괜찮아. 할머니가 있었어. 근데 엄마는 왜 못 왔어?" 일 때문이라고 할까. 회사 때문이라고 할까. "엄마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엄마 일이 나보다 중요해?" 7살짜리가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이 안 나왔다. 딸이 고개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엄마는 대표잖아. 할머니가 그랬어. 엄마는 멋진 일 한다고." 그 말에 또 울었다. 저녁 먹으면서도, 설거지하면서도. 밤 11시, 다이어리 오늘 미팅 결과는 나빴다. "좀 더 고민해보겠다"는 답을 들었다. 매출은 전월 대비 12% 올랐다. 나쁘지 않았다. 신규 제휴 건 2개가 성사 직전이었다. 팀원들 야근 없이 다 퇴근시켰다. 객관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근데. 딸의 운동회 사진을 다시 봤다. 12장 중에 나는 한 장도 없었다. 나쁜 엄마의 증거 여성 CEO 모임에서 들은 얘기. "우리는 선택하면 안 돼. 다 잘해야 해." 맞는 말이었다. 남편은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나가면 "육아 참여하는 좋은 아빠"였다. 나는 매일 아침 저녁 챙겨도 "애 놔두고 일만 하는 엄마"였다. 똑같이 창업해도 남자는 "도전하는 사업가", 나는 "애 두고 사업하는 엄마"였다. 기준이 달랐다. 시어머니가 명절 때 했던 말. "며느리가 회사를 다니면 애들이 불쌍하지." 친정엄마는 달랐다.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엄마가 도와줄게." 두 할머니, 두 세대, 두 가지 시선. 딸은 어떤 걸 보고 자랄까. 그래도 내일 아침에도 5시에 일어날 거다. 아이들 깨우고, 아침 먹이고, 등원시키고. 8시 반에 출근해서 미팅하고, 전략 짜고, 팀 이끌고. 저녁에 퇴근해서 저녁 먹이고, 숙제 봐주고, 재우고. 그리고 다시 노트북 열 거다. 이게 나쁜 엄마의 증거는 아닐 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딸이 자라서 엄마를 기억할 때. "우리 엄마는 운동회에 못 왔어"가 아니라 "우리 엄마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날 키웠어"였으면.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엄마 아닐까. 엄마 톡 자기 전에 친정엄마한테 톡 보냈다. "엄마, 오늘 고마워. 미안해." 1분 만에 답장 왔다. "미안할 거 없어. 넌 잘하고 있어. 은지 엄청 자랑스러워했어. 엄마 얘기 하루 종일 했다." 그 말이 위로가 됐다. 조금. 내일은 또 다른 날이 올 거다. 또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거다. 또 죄책감이 밀려올 거다. 근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는 대표고, 엄마고, 아내고, 딸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믿고 싶다.오늘 하루, 버텼다. 내일도 버틸 거다.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