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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의 대화가 '육아 스케줄' 공유로 끝나는 요즘

남편과의 대화가 '육아 스케줄' 공유로 끝나는 요즘

남편과의 대화가 '육아 스케줄' 공유로 끝나는 요즘 대화가 사라진 부부 어젯밤 남편이 말을 걸었다. "내일 회의 길어질 것 같은데, 아이들 픽업 가능해?" 나는 캘린더를 열었다. "4시까지는 힘들고, 5시면 돼." "알겠어. 그럼 엄마한테 부탁할게." "응." 대화 끝.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우리 언제부터 이랬지. 결혼 10년 차다. 대화의 90%가 아이들 일정이다. "내일 준호 학원 몇 시야?" "지아 준비물 챙겼어?" "다음 주 학부모 상담 누가 갈래?" "주말에 애들 어디 데리고 갈까?" 이런 것만 나눈다.언제부터였을까 둘째 낳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아니, 그전부터였을 수도. 연애 시절엔 밤새 통화했다. 신혼 때는 주말마다 데이트했다. 드라마 같이 보고, 맛집 찾아다니고. 첫째 낳고도 괜찮았다. 아기 재우고 와인 마시며 이야기했다. "오늘 지아가 뒤집기 했어." "우리 딸 천재 아냐?"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있었다. 둘째는 달랐다. 창업도 겹쳤다. 나는 회사 키우느라, 남편은 승진 준비하느라. 아이 둘은 각자 다른 시간표로 움직였다. 어느새 우리는 '육아 파트너'가 됐다. 부부가 아니라. 남편도 노력한다 불만은 아니다. 남편은 정말 노력한다. 주변 대기업 남자들 중에선 잘하는 편이다. 아침에 아이들 밥 먹인다. 주말엔 공원 데리고 간다. 분리수거도 하고, 설거지도 한다. 시어머니가 놀랐다. "우리 아들이 집안일을 해?" 나는 웃었다. '집안일'이 아니라 '당연한 거'인데. 그래도 남편은 바뀌었다. 예전엔 '육아는 엄마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캘린더에 아이들 일정 다 넣는다. 나보다 더 꼼꼼할 때도 있다. 고맙다. 진심으로. 근데 뭔가 부족하다.우리는 팀원이 됐다 어느 날 깨달았다. 우리는 '프로젝트 팀'이다. 프로젝트명: 육아. 목표: 아이들 잘 키우기. 역할 분담: 명확. 업무 보고: 수시로. "내일 PT 있어서 늦을 것 같아." "알겠어, 내가 저녁 담당할게." "지아 준비물은?" "체크했어." "고마워." 효율적이다. 문제없다. 잘 굴러간다. 근데 외롭다. 회사에서도 팀 미팅한다. 집에서도 팀 미팅한다. 남편과의 대화가 슬랙 메시지 같다. "확인했습니다." "처리하겠습니다." "공유 감사합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업무적이 됐지. 연애가 그립다 가끔 남편이 웃으면 낯설다. '아, 이 사람 이렇게 웃었지.' 지난주 회식 사진을 봤다. 남편이 동료들과 맥주 마시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편하게 웃은 게 언제였지. 나한테는 안 웃는다. 아니, 웃긴 한다. 근데 다른 웃음이다. 피곤한 웃음. 의무적인 웃음. 나도 마찬가지다. 투자자 미팅에선 활짝 웃는다. 직원들이랑은 편하게 농담한다. 남편한테만 딱딱하다. 왜지. 생각해봤다. 남편 앞에서 긴장한다. 아이들 일 제대로 못 하면 미안하다. 회사 때문에 늦으면 미안하다. '좋은 엄마'가 못 되는 것 같아서. 남편도 그럴까. '좋은 아빠' 해야 한다는 부담. 그래서 우리가 서로 어색한 걸까.어제 저녁의 짧은 순간 어제 아이들 재웠다. 거실로 나왔다. 남편이 소파에 있었다. 보통은 각자 노트북 연다. 나는 슬랙, 남편은 이메일. 30분 후 각자 자러 간다. 근데 어제는 달랐다. 남편이 TV를 켰다.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같이 볼래?" 순간 당황했다. '나 일 해야 하는데...' 근데 앉았다. 프로그램은 재미없었다. 근데 웃었다. 남편도 웃었다. "저 사람 웃기네." "완전." 짧은 대화. 30분. 별거 아니었다. 근데 오랜만이었다. '육아 스케줄' 없이 나눈 대화. 남편이 말했다. "요즘 너 많이 힘들지?" "응, 너도 그렇고." "...그러게." 또 침묵. 근데 이 침묵은 편했다. 우리는 여전히 부부다 깨달았다. 나는 남편을 '아이들 아빠'로만 봤다. 남편도 나를 '아이들 엄마'로만 봤을 것이다. 우리는 역할이 됐다. 사람이 아니라. '대표'인 나. '과장'인 남편. '엄마'인 나. '아빠'인 남편. 근데 원래는 아니었다. '지영'이었고 '민수'였다. 28살 회사원이었고 30살 영업사원이었다. 그 사람들은 어디 갔지. 오늘 아침에 물었다. "당신 요즘 행복해?" 남편이 놀랐다. "갑자기?" "그냥." 남편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잘 모르겠어. 너는?" "나도." 솔직한 대답이었다. 행복한가. 불행하지는 않다. 아이들은 건강하다. 회사는 잘 굴러간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다. 근데 행복하냐고 하면. 잘 모르겠다. 작은 시도들 바꿔보기로 했다. 거창하게는 못 한다. 시간도 없고 체력도 없다. 근데 작게라도. 첫째, 주 1회 '우리 시간'. 아이들 재우고 30분만. TV든 뭐든 같이 본다. 스케줄 얘기 금지. 둘째, 아침 커피. 남편이 먼저 일어나면 커피를 내린다. 내가 먼저면 내가 내린다. 같이 마신다. 5분이라도. 셋째, 감사 표현. "고마워" 자주 하기. 당연한 거 없다고 생각하기. 넷째, 스킨십. 출근할 때 포옹. 어색하지만 해보기. 거창하지 않다. 근데 안 하던 것들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며칠 해봤다. 매일은 못 한다. 회의 늦으면 못 본다. 남편 야근하면 각자 잔다. 완벽하지 않다. 근데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남편이 웃는 횟수가 늘었다. 나도 덜 외롭다. 여전히 대화의 대부분은 육아다. "내일 준호 치과." "알겠어." 근데 가끔은 다른 얘기도 한다. "오늘 회의에서 말이야..." "어제 그 드라마 봤어?" 작은 것들. 우리는 완벽한 부부가 아니다. 연애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다. 아이 둘 키우면서 창업하고 직장 다니는데. 당연히 힘들다. 근데 포기는 안 하려고. '육아 파트너'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부부니까. 오늘 밤에도 오늘도 아이들 재웠다. 거실로 나왔다. 남편이 노트북 보고 있다. "일 많아?" "응, 좀." "힘들겠다." "너도." 짧은 대화. 예전 같으면 여기서 끝이었다. 근데 오늘은 말했다. "10분만 쉬고 해." "...그럴까." 남편이 노트북을 덮었다. 나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말은 별로 없었다. 근데 괜찮았다. 10년을 함께 산 사람. 아이 둘을 함께 키우는 사람. 힘들 때 옆에 있는 사람. 완벽하지 않아도. 매일 사랑한다고 말 못 해도. 데이트 자주 못 해도. 우리는 부부다. 여전히. 지금 이대로 변하고 싶다. 동시에 지금이 나쁜 건 아니다. 우리는 나름 잘하고 있다. 아이들은 행복하다. 각자 일도 열심히 한다. 싸우지도 않는다. 근데 '나쁘지 않다'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좋아서 결혼했으니까. 육아 스케줄 공유하는 팀원이 아니라. 부부로 살고 싶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자주 실패할 것이다. 바쁜 날은 또 각자 살 것이다. 그래도 계속 시도하려고. 아주 작게라도. 남편도 그런 것 같다. 어제 말했다. "우리 주말에 영화 볼까?" "아이들은?" "...엄마한테 부탁하고." 데이트.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좋아." 작은 시작. 근데 시작은 한 거다.육아 파트너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부부니까. 작게라도 시도해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