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시간

'시간 없어서요'가 내 버릇이 된 언제부터인가

'시간 없어서요'가 내 버릇이 된 언제부터인가

'시간 없어서요'가 내 버릇이 된 언제부터인가 또 그 말을 했다 "죄송해요, 시간이 없어서요." 오늘만 세 번째다. 아침에 남편한테, 점심에 투자사 담당자한테, 저녁에 딸아이한테. 입에 붙었다. 자동 응답처럼 나온다. 남편이 "이번 주말에 우리 둘이 영화 볼까?" 했을 때. 투자사에서 "다음 주 목요일 저녁 어떠세요?" 물었을 때. 딸이 "엄마 금요일 학예회 올 거지?" 물었을 때. 전부 같은 대답이었다. "시간이 없어서."그런데 진짜 시간이 없는 걸까. 오늘 캘린더를 다시 봤다. 9시부터 7시까지 빼곡하긴 하다. 팀 회의, 1대1 미팅, 신규 브랜드 제안서 검토, 시리즈A 후속 보고. 근데 그 사이 SNS는 봤다. 유튜브 쇼츠도 3개 봤다. 점심 먹고 동료랑 커피 마시면서 30분 수다 떨었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었다. 우선순위가 꽉 차 있는 거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창업 1년차엔 안 그랬다. "시간 만들면 되죠!" 했다. 실제로 만들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저녁엔 남편이랑 와인 마시고, 주말엔 아이들이랑 놀이터 갔다. 2년차부터 달라졌다. 직원이 5명에서 10명이 됐다. 책임이 늘었다. 누군가 "대표님 이것 좀 봐주세요" 하면 못 본 척 못 했다. 투자 미팅이 잡히면 무조건 갔다. "다음에요"가 "안 된다"는 뜻인 걸 알았으니까. 3년차엔 아예 포기했다. 운동은 사치. 친구 약속은 3개월에 한 번. 부부 데이트는 기념일만. 딸아이 학예회는... 작년 거 하나 놓쳤다. 올해도 놓칠 것 같다."시간 없어서요"가 내 시그니처가 됐다. 명함에 새겨도 될 정도다. 김대표, 38세, '시간 없는 사람'. 진짜 중요한 건 뭘까 어제 딸이 물었다. "엄마는 회사가 더 중요해, 나랑 동생이 더 중요해?" 칼이었다. 가슴에 꽂혔다. "너희가 더 중요하지!" 했다. 근데 거짓말 같았다. 내 캘린더는 정직했다. 회의 12개, 미팅 8개, 아이들 학교 행사 1개. 그것도 '미정'. 중요한 건 뭘까. 진짜로. 회사가 잘 돼야 아이들 학비 낼 수 있다. 투자 받아야 직원들 월급 줄 수 있다. 브랜드 미팅 가야 매출이 는다. 다 맞는 말이다. 근데 딸아이 학예회는 올해밖에 없다. 2학년 학예회는 다시 안 온다. 남편이랑 영화 보는 것도, 올해 안 보면 내년엔 또 다른 핑계가 생긴다.우선순위가 꽉 차 있다는 건, 누군가를 계속 밀어내고 있다는 뜻이다. 회사 일이 1순위면, 가족은 2순위다. 투자사 미팅이 먼저면, 부부 데이트는 나중이다. 신규 브랜드 제안이 급하면, 내 운동은 안 급하다. 그렇게 밀려난 것들이 쌓인다. 남편의 서운함, 딸의 실망, 내 건강, 친구들과의 거리. 전부 "나중에"로 쌓여있다. 언젠간 처리해야 할 숙제처럼. 포기하고 있는 것들 정리해봤다. 내가 '시간 없어서'라는 말로 실제로 포기한 것들. 운동. 작년엔 필라테스 3개월 끊었다. 5번 갔다. 1회당 12만원. 웃긴다. 친구. 대학 동기들 만남 3번 연속 펑크. 이제 단톡방에서 내 이름 부르면 다들 "또 시간 없다고 하겠지" 농담한다. 농담이 아니다. 사실이다. 부부 대화. 침대에 눕자마자 노트북 켠다. 남편이 "오늘 어땠어?" 물으면 "피곤해"라고 답한다. 대화가 아니다. 리포트다. 나. 책 읽는 것, 음악 듣는 것, 그냥 멍 때리는 것. 다 없어졌다. 나를 위한 시간이 제일 먼저 잘렸다. 매일 아침 거울 보면 낯설다. 이게 나인가. 항상 피곤한 얼굴, 항상 바쁜 표정, 항상 "시간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네 선택이잖아." 맞다. 내가 선택했다. 창업도, 확장도, 투자 유치도. 다 내가 원했다. 근데 선택이라는 말이 면죄부는 아니다. 선택한 것에도 대가가 있다. 회사를 선택하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포기한 거다. 선택과 포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요즘 드는 생각.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무엇을 잃고 있는가. 회사가 시리즈B 받고, 매출이 월 2억 되고, 직원이 30명 되면. 그때는 시간이 날까. 아니다. 더 바빠진다. 더 많은 회의, 더 큰 책임, 더 복잡한 문제. 결국 '시간이 나면'이라는 가정은 오지 않는다. 시간은 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다. 근데 나는 만들지 않고 있다. 핑계만 만들고 있다. "시간 없어서요." 이 말은 거짓말이다. 진짜 의미는 이거다. "당신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요." 잔인하지만 사실이다. 오늘은 달리 말해볼까 오늘 저녁, 딸이 또 물었다. "엄마 금요일 올 수 있어?" 입이 먼저 움직였다. "시간이..." 근데 멈췄다. 다시 생각했다. 금요일 오후 2시. 신규 브랜드 제안 미팅이 잡혀 있다. 옮길 수 있나. 옮길 수 있다. 옮기고 싶냐. 솔직히 귀찮다. 하지만 해야 하나. 해야 한다. "갈게." 말했다. "엄마 꼭 갈게." 딸이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 보니까 알겠다. 내가 뭘 포기하고 있었는지. 미팅은 다음 주로 옮겼다. 담당자한테 "개인 사정이 생겨서요" 했다. 개인 사정. 딸의 학예회. 이것도 '사정'이 맞다. 중요한 사정이다. 캘린더에 금요일 오후 2시를 블록했다. 제목은 "은지 학예회". 회의실 예약하듯 블록했다. 이 시간만큼은 누가 뭐래도 안 옮긴다. 시간은 만드는 것 깨달았다. 시간 없다는 말은 변명이다. 진짜 의미는 "우선순위가 아니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만든다. 투자사 대표가 "내일 점심 어때요?" 하면 만든다. 기존 약속 옮기고, 회의 미루고, 시간 만든다. 왜. 중요하니까. 가족도 중요하다. 남편도 중요하다. 나도 중요하다. 근데 이건 안 만들고 있었다. '나중에'로 미루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이제 바꾸려고 한다. 완벽하게는 못 바꾼다. 나도 안다. 여전히 바쁠 거고, 여전히 선택해야 하고, 여전히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건 바꾸고 싶다. "시간 없어서요"라는 자동 응답. 이 말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기. 진짜 시간이 없나, 아니면 우선순위가 아닌가. 그리고 가끔은 우선순위를 바꾸기. 회사가 아니라 가족을, 투자사가 아니라 남편을, 미팅이 아니라 나를 먼저 두기. 버릇을 고치는 중 여전히 바쁘다. 오늘도 회의 3개, 미팅 2개 있다. 근데 저녁 7시는 비워뒀다. 남편이랑 집에서 같이 저녁 먹기로 했다. 배달 시켜서 먹을 거다. 근사하진 않다. 근데 함께 있는 시간이다. 토요일 오전도 비워뒀다. 아이들이랑 놀이터 가기로 했다. 노트북 안 들고 간다. 슬랙 알림도 끈다. 2시간만. 온전히 엄마로만 있는 시간. 일요일 저녁은 내 시간이다. 책 한 권 읽는다. 아무도 방해 안 한다. 남편한테 부탁했다. "이 시간만큼은 나 좀 내버려 둬." 남편이 웃으며 고개 끄덕였다. 작은 시작이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다. 근데 이렇게라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안 그러면 10년 뒤에도 똑같을 것 같다. "시간 없어서요"라고 말하면서, 정작 중요한 걸 계속 놓치면서. 누구를 위한 바쁨인가 가끔 생각한다. 나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사는가. 회사 키우려고. 맞다. 그럼 회사는 왜 키우나. 가족 먹여 살리려고. 맞다. 그럼 가족과의 시간은 왜 없나. 모순이다. 가족을 위해 일한다면서, 가족과의 시간은 제일 나중이다. 아이들 좋은 학교 보내려고 번다면서, 아이들 학교 행사는 못 간다. 남편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도 회사 다닌다. 과장이다. 야근도 한다. 근데 이 사람은 "시간 없어"란 말 잘 안 한다. 주말엔 아이들이랑 논다. 저녁엔 설거지한다. 어떻게 그럴까. 물어봤다. "당신은 어떻게 시간을 내?" 남편이 웃었다. "안 내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지. 중요하니까." 맞다. 만드는 거다. 중요하면 만든다. 나도 회사 일은 만든다. 투자 미팅, 브랜드 제안, 팀 회의. 다 중요하니까 만든다. 그럼 가족은. 나는. 덜 중요한가. 아니다. 더 중요하다. 근데 덜 긴급하다. 여기가 함정이다.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것들은 계속 밀린다. 변명을 멈추기로 했다 "시간 없어서요"는 이제 안 쓰려고 한다. 대신 솔직하게 말하려고 한다. "지금은 다른 게 더 급해서요." 또는 "이게 제겐 우선순위가 아니에요." 또는 "죄송하지만 이번엔 못 할 것 같아요." 변명 안 한다. 핑계 안 댄다. 시간 탓 안 한다. 내 선택이니까. 선택하는 거니까. 근데 동시에 이것도 하려고 한다. 가끔은 우선순위 바꾸기. 회사가 1순위인 날이 80%라면, 가족이 1순위인 날을 20%는 만들기. 나를 1순위로 두는 날을 10%는 만들기. 완벽하진 않을 거다. 여전히 회의 많고, 미팅 많고, 결정해야 할 게 많다. 여성 CEO라는 것도 여전히 힘들다. "애 있는데 괜찮으세요?"라는 질문도 여전히 받는다. 근데 적어도 이건 바꿀 수 있다. 내가 뭘 선택하고, 뭘 포기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것. "시간 없어서요"가 아니라 "이번엔 이걸 선택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시간은 없는 게 아니다. 만드는 거다. 중요한 건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