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경력
- 15 Dec, 2025
11번가 MD 경력, 그것이 자산이 되고 때론 족쇄가 되는 이유
11번가 MD 경력, 그것이 자산이 되고 때론 족쇄가 되는 이유 명함 때문에 받는 첫 미팅 "11번가 MD 출신이시라고요?" 투자자 미팅마다 듣는 말이다. 눈빛이 달라진다. 기대가 올라간다. "그럼 숫자는 잘 보시겠네요." "바이어 관리 경험 많으시죠?" "대기업 시스템 아시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시면 되죠?" 그럴 때마다 대답한다. "네, 그렇죠." 웃으면서. 속으로는 안다. 이 기대가 독이 될 거라는 걸.11번가에서 배운 것들 6년 했다. 육아용품 카테고리 MD. 월 매출 50억 관리했다. 바이어 200개 사 담당했다. 프로모션 기획하고, 수수료 협상하고, 재고 관리하고. 잘했다. 승진도 빨랐다. 팀장 달고 나올 뻔했는데 창업했다. 그때 배운 것들:데이터 보는 법 바이어 설득하는 법 프로모션 시즌 감 잡는 법 대량 거래 협상 노하우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법지금도 쓴다. 매일 쓴다. 근데 그게 다가 아니더라.자산이 되는 순간들 시리즈A 투자 받을 때였다. "김대표님, 이 conversion rate가 왜 떨어졌죠?" "재구매율이 작년 대비 어떻게 되나요?" "카테고리별 수익률 구조 설명 가능하세요?" 다 대답했다. 숫자로. 근거 대면서. 투자자가 고개 끄덕였다. "역시 경력자는 다르네요." 그날 15억 받았다. 직원 뽑을 때도 도움된다. 이력서 볼 때, 면접 볼 때, '실무'가 뭔지 아니까. 허상 거르는 게 빠르다. 바이어 미팅도 마찬가지. "11번가에서 일하셨다고요?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요." 신뢰가 올라간다. 경력이 문 여는 열쇠일 때가 있다. 분명히 있다. 족쇄가 되는 순간들 그런데. "11번가 출신인데 왜 이렇게 밖에 안 돼요?" 시리즈B 준비하면서 들은 말이다. 다른 VC였다. "월 매출 8000만원이요? 이 정도면... 좀 아쉬운데요." "대기업 출신이면 네트워크가 있을 텐데, 왜 입점 브랜드가 이것밖에 안 되죠?" "시스템도 아직 이 정도예요? 11번가 계셨으면 훨씬 체계적일 줄 알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11번가는 직원 수천 명에 인프라 다 깔려 있는 곳이었다. 나는 MD 한 명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대표고, 직원 15명이고, 돈 없고, 시스템 없고, 모든 걸 직접 해야 한다. 비교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사람들은 비교한다. 경력 때문에.실패의 무게가 다르다 작년 크리스마스 프로모션 망했다. 광고비 2000만원 썼는데 매출 3500만원 나왔다. 마진 거의 없다. 손해다. 그냥 망한 거다. 스타트업에서 흔한 일이다. 근데 투자자 보고할 때: "김대표님, 11번가에서 프로모션 많이 하셨잖아요. 이건 좀 실망이네요." 직원들 앞에서도: "대표님 경력으로 이 정도는 피하셨어야죠." 남편한테도 들었다: "여보, 11번가 다닐 때는 이런 실수 안 했잖아." 경력이 없는 대표들은 '배우는 과정'이라고 포장된다. 나는 '실수'가 된다. 기준이 다르다. 관대함이 없다.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이유. 아이들 깨기 전에 일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르다. '경력자인데 이것도 못 하냐'는 소리 듣기 싫어서다. 경쟁사 대표는 나보다 어리다. 경력 없다. 근데 우리보다 빠르게 큰다. 사람들은 말한다. "김대표님은 경력이 있으니까 곧 따라잡으시겠죠?" 압박이다. 기대가 압박이 된다. 매일 더 해야 한다. 경력값을 해야 한다. 증명해야 한다. 지친다. 11번가 동기들과의 거리 작년에 동기 만났다. 11번가 동기. 얘는 아직 거기 있다. 이제 팀장이다. 연봉 8500만원. "너 회사 어때? 잘 돼?" "응, 그럭저럭." 거짓말이다. 잘 안 된다. 힘들다. 근데 말 못 한다. "11번가 그만두고 창업했는데 잘 안 돼"라고 하면, 그게 곧 '실패'가 되니까. 동기는 묻는다. "그래도 재밌지? 자유롭고?" "응, 재밌어." 이것도 반쯤 거짓말이다. 재밌긴 한데, 자유롭진 않다. 책임이 무겁다. 동기는 정시 퇴근한다. 나는 밤 10시에 노트북 연다. 동기는 월급 나온다. 나는 3개월째 내 월급 못 받았다. "그래도 네가 부러워. 네 사업이잖아." 고맙다. 근데 부담된다. 경력이 만드는 이상한 기대들 미팅 가면 사람들이 예상한다. "11번가 출신이면 네트워크 엄청나시겠네요." 실제로는: 6년 전 명함이다. 연락 끊긴 사람 더 많다. "대기업 시스템 그대로 적용하면 되겠네요." 실제로는: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그 시스템 못 돌린다. "투자 받기 쉬우셨겠어요." 실제로는: 100군데 넘게 돌아다녔다. 거절도 수없이 들었다. 경력이 만능 키처럼 보인다. 근데 아니다. 스타트업은 대기업 미니어처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게임이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한다 솔직히 털어놓으면. 11번가 그만둔 거 후회한 적 있다. 여러 번 있다. 특히 투자 안 받고, 매출 안 나오고, 직원 월급 걱정될 때. '그냥 다닐 걸' 싶었다. 근데 다시 생각하면, 안 한다. 대기업은 편했다. 시스템 있고, 돈 있고, 안정적이고. 근데 내 선택이 아니었다. 내 카테고리도 아니었다. 내 숫자도 아니었다. 지금은 다 내 거다. 망하든 되든 내 거다. 무겁다. 힘들다. 근데 내 것이다. 경력이 자산인지 족쇄인지 묻는다면, 대답은 '둘 다'다. 그리고 나는 이 족쇄를 스스로 찼다. 후회 없다. 경력자 창업의 진짜 어려움 요즘 깨닫는 것. 경력 없는 대표들은 '몰라서' 부딪힌다. 그게 오히려 자유다. 나는 '알아서' 조심한다. 그게 오히려 족쇄다. "이건 11번가에서 안 먹혔는데..." "대기업에서는 이렇게 안 하는데..." 자꾸 비교한다. 과거가 기준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도 비교한다. 나를 과거의 나랑 비교한다. "11번가 MD 출신이면 더 잘할 줄 알았어요." 이 말이 가장 아프다. 잘하고 싶다. 경력값 하고 싶다. 근데 대기업 MD랑 스타트업 대표는 다른 직업이다. 그걸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조차도 가끔 헷갈린다. 그럼에도 쓸 수 있는 것들 불평만 한 것 같다. 그건 아니다. 11번가 경력이 도움 되는 순간들:데이터 볼 때. 숫자 뒤의 패턴 읽는 법. 바이어 협상할 때. 딜 구조 짜는 법. 직원 교육할 때. 실무 구조 알려주는 법. 위기 올 때. '이 정도는 아니야' 하는 경험.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무'를 안다는 것. 많은 창업가들이 이상만 말한다. 비전만 말한다. 나는 실행을 말한다. 숫자를 말한다. 어떻게 굴러가는지 안다. 그게 경력의 진짜 가치다. 요즘 하는 생각 밤 11시. 아이들 재우고 노트북 켰다. 슬랙에 메시지 100개. '내일은 투자자 미팅이다. 또 물어볼 거다. "11번가 출신인데 왜..."' 한숨 나온다. 근데 웃긴 건, 나도 나한테 묻는다는 거다. '11번가 6년 했는데, 왜 이것밖에 못 하지?' 스스로가 가장 가혹하다. 커피 한 모금. 네 번째다. 내일도 증명해야 한다. 경력값을 해야 한다. 자산이면서 족쇄인 이 경력을 끌고, 오늘도 간다.경력은 날개인데, 왜 이렇게 무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