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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층
- 14 Dec, 2025
강남 위워크 11층, 스타트업 오피스의 현실과 이상
11층에서 본 풍경 강남 위워크 1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여전히 설렌다.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리벽 너머로 강남대로가 보인다. 아침 9시, 출근하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움직인다. 나도 저들 중 하나였다. 11번가 MD 5년, 나쁘지 않았다. 그때는 여기가 꿈이었다. '언젠가 저런 곳에서 일하겠지.' 위워크 11층, 스타트업 대표.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2020년 1월. 처음 계약서에 사인했다. 보증금 500만원, 월세 280만원. 6인실 작은 공간. 남편이 물었다. "너무 비싼 거 아냐?" 아니었다. 투자였다. 좋은 주소는 브랜드다. 직원 3명이랑 입주했다. 프리 맥주, 커피, 간식. 회의실은 앱으로 예약. 복사기도 스캐너도 다 있다. '여기서 성공하자.' 모두 눈빛이 반짝였다. 나도 그랬다. 진짜로. 4년이 지났다 지금은 15인실로 옮겼다. 월세 650만원. 직원은 15명. 숫자만 보면 성장이다. 시리즈A 15억 유치했다. 테크크런치 기사도 났다. "여성 육아용품 큐레이션 플랫폼, 투자 유치 성공" 축하 메시지가 쏟아졌다.근데 여기 앉아있으면 이상하다. 내가 뭘 이룬 건지 모르겠다. 월매출 8000만원. 손익분기점 근접. 투자자 보고는 '선방'이다. 그런데. 저녁 7시에 퇴근한다. 아이들 저녁 먹여야 해서. 직원들은 9시까지 있다. 미안하다. 늘. "대표님 먼저 가세요." 다들 웃으며 말한다. 진심인지 모르겠다. 남자 대표들은 밤 11시까지 있다. 옆 팀 대표는 자정 넘어 택시 타고 간다. "헌신적"이라고들 한다. 나는? "워라밸 챙기시네요." 투자자가 웃으며 말했다. 칭찬인지 비난인지. 이상과 현실 사이 4년 전엔 이상만 있었다. '여성도 창업할 수 있다.' '엄마도 대표가 될 수 있다.' '아이 키우면서도 성공할 수 있다.' 믿었다. 진짜로.근데 현실은 다르다. 새벽 5시에 일어난다. 아이들 깨기 전 2시간. 이게 내 골든타임이다. 메일 확인, 기획서 검토, 슬랙 답장. 7시에 아이들 깨운다. 밥 먹이고, 옷 입히고, 등원시킨다. 8시 반에 위워크 도착. 점심은 미팅이다. 투자자, 파트너사, 입점 브랜드. 밥 먹는 건지 일하는 건지. 저녁 7시 퇴근. 아이들 데리고 저녁 먹는다. 숙제 봐준다. 씻긴다. 재운다. 밤 10시. 노트북 다시 켠다. 직원들이 올린 슬랙 메시지. "대표님, 내일 회의 전에 검토 부탁드려요." 12시에 잔다. 5시간 자고 다시 일어난다. 이게 4년째다. 여기서 본 것들 위워크엔 스타트업이 많다. 다 비슷해 보인다. 맥북, 듀얼모니터, 서서 일하는 책상. 근데 다르다. 남자 대표들은 밤늦게까지 있다. 주말에도 나온다. "회사가 내 애기죠." 농담처럼 말한다. 여자 대표는 드물다. 11층에 나 포함 3명. 한 명은 미혼, 한 명은 아이 없다. 아이 있는 여성 대표는 나뿐. 투자자 미팅 때마다 듣는다. "아이 있으시죠? 시간 괜찮으세요?" 남자 대표한테는 안 묻는다. 한 번은 화가 났다. "괜찮습니다. 그래서 새벽 5시에 일합니다." 말했다. 투자자가 웃었다. "열정 있으시네요." 열정? 선택지가 없는 거다. 옆 팀 남자 대표. 30대 초반, 미혼. 밤 11시까지 일한다. 주말에 해외 출장 간다. 투자자들이 좋아한다. "저런 친구가 성공하죠." 나는? "대표님, 워라밸 좋으시겠어요."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여기 있는 이유가 있다. 작년 가을, 고객 후기 하나를 봤다. "저희 집 아기 피부가 너무 약해서 고민이었는데, 여기서 추천해준 제품 써보니 좋아졌어요. 감사합니다." 그 순간. '아, 이거구나.' 돈 벌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육아하면서 아팠던 기억. 믿을 만한 제품 찾기 어려웠던 기억. '내가 만들자.' 그래서 시작했다. 시리즈A 투자 유치했을 때. 남편이 물었다. "이제 좀 여유로워지겠네?" 아니었다. 더 바빠졌다.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 투자금은 직원 월급이다. 마케팅 비용이다. 재고 확보다. 내 통장엔 여전히 돈이 없다. 대표 월급 300만원. 4년째 그대로다. 남편 월급으로 산다. 애들 학원비도, 생활비도. 미안하다. 늘. 11층의 밤 가끔 야근한다. 아이들 친정에 맡기고. 직원들 다 퇴근하고. 밤 10시 위워크. 조용하다. 청소하시는 분만 계신다. 창밖을 본다. 강남이 빛난다. 여전히 불 켜진 건물이 많다. 다들 열심히 산다. 나도.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안다. 4년 전 꿈꿨던 것과 지금이 다르다는 걸. 그래도. 여기 있다. 11층 위워크. 강남대로가 내려다보이는 곳. 여자가, 엄마가, 대표로 있다. 쉽지 않다. 매일 미안하고 힘들다. 근데 그만둘 생각은 없다. 아침이 온다 새벽 5시. 알람이 울린다. 자동으로 몸이 일어난다. 거실로 나간다. 아이들 장난감이 어질러져 있다. 어젯밤에 못 치웠다. 노트북을 켠다. 슬랙에 메시지 50개. 메일 80통. 커피를 내린다. 세 번째다. 아니, 첫 번째. 하루가 시작된다. 7시. 아이들 깨운다. "엄마, 오늘 수업 참관 오는 거지?" 딸아이가 묻는다. 캘린더를 확인한다. 투자자 미팅이 잡혀 있다. 옮길 수 없다. "미안해. 다음엔 꼭 갈게." 딸이 실망한 표정이다. 칼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다. 8시 반. 위워크에 도착한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11층. 문이 열린다. 유리벽 너머로 강남이 보인다. 오늘도 사람들이 움직인다. 이상과 현실. 꿈과 일상. 대표와 엄마. 다 나다. 동시에 존재한다. 완벽하지 않다. 그래도 여기 강남 위워크 11층. 4년이 지났다. 처음 꿈꿨던 것과 다르다. 더 힘들다. 더 복잡하다. 근데 후회는 없다. 여자도 창업할 수 있다. 엄마도 대표가 될 수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직원 15명이 매일 출근한다. 고객들이 후기를 남긴다. 투자자들이 기대한다. 압박이지만 책임이다. 무겁지만 의미 있다. 저녁 7시. 오늘도 퇴근한다. 직원들에게 말한다. "수고했어요. 내일 봐요." 다들 웃으며 답한다. "대표님도요." 미안함과 감사함. 항상 같이 온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11층에서 1층으로. 문이 열린다. 강남역 출구.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나도 섞인다. 집으로 간다. 아이들이 기다린다. "엄마 왔다!" 안는다. 따뜻하다. 이것도 내 일이다. 밤 10시. 노트북을 다시 켠다. 내일 준비한다. 새벽 5시에 또 일어날 것이다. 위워크 11층으로 갈 것이다. 계속 할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 나는 여기 있다.완벽한 대표도, 완벽한 엄마도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