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결혼, 요즘 남편과 '부부'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
- 27 Dec, 2025
10년 결혼, 요즘 남편과 ‘부부’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
어제 남편이랑 한 대화
“내일 준호 학원 픽업 누가 해?” “내가. 너 투자자 미팅 있잖아.” “고마워. 그럼 은서는?” “시어머니한테 부탁했어.” “알았어. 참, 주말에 장 좀 봐야 돼.” “응. 리스트 공유해줘.”
끝이다. 어제 저녁 남편이랑 나눈 대화의 전부다.
아침엔 “다녀와” 했고, 밤엔 “먼저 자” 했다. 그게 다였다. 10년 전 신혼 때 우리가 이런 대화만 하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요즘 남편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이 사람이 내 남편 맞나?’ 아니, 남편이긴 한데. 뭐랄까. ‘부부’라기보단 ‘동료’같다. 아니, 동료보다 못할 때도 있다. 회사 직원들이랑 점심 먹으면서 더 많이 웃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히 언제부턴지 모르겠다. 은서 낳고부터? 아니면 내가 회사 세우고부터? 둘 다일 수도 있다.
첫째 낳고 나서 1년은 정신이 없었다. 수유하고 재우고 또 수유하고. 남편이랑 대화? 그럴 시간에 자는 게 먼저였다. “애 울어” “응 내가 볼게” 이런 말만 100번씩 했다.
그래도 그땐 괜찮았다. 힘들어도 ‘우리 같이 키우는구나’ 느낌이 있었다. 새벽 3시에 아기 울음소리에 같이 벌떡 일어나서, 남편이 나한테 물 떠다주고, 나 수유하는 동안 남편이 기저귀 갈고. 그런 게 있었다.
둘째 때는 달랐다. 나는 회사 세운 지 1년차였고, 투자 유치 직전이었다. 남편은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야근이 늘었다. 둘 다 바빴다. 너무 바빴다.
“나도 힘들어” “나도 힘든데”
이 대화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결국 둘 다 힘들다는 결론만 남고, 해결책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대화 자체를 안 하게 됐다. 힘들다고 말하면 또 싸울 것 같아서.

우리 부부의 대화 패턴
요즘 우리 대화를 분석해봤다. 웃긴다. 회사에선 데이터 분석하면서 내 결혼 생활은 분석 안 하고 있었네.
80%: 육아 관련
- 학원 픽업 누가 할지
- 준비물 뭐 사야 하는지
- 아이 감기약 먹였는지
- 부모 상담 누가 갈지
15%: 집안일 분배
- 장 누가 볼지
- 청소기 돌렸는지
- 쓰레기 버렸는지
- 명절 준비 어떻게 할지
5%: 기타
- 회사 일 간단히
- “피곤해” “나도”
- “먼저 자” “응”
이게 다다. 10년 결혼 생활의 현주소다.
대화 주제가 아이들 아니면 집안일이다. 우리 둘에 관한 얘기는 없다. “오늘 어땠어?” 이런 질문도 안 한다. 물어봐도 “그냥 그랬지” 이런 대답만 돌아올 거 알아서.
가끔 남편이 회사 일 얘기하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그래서 결론이 뭔데?” 이렇게 물어본다. 회사에서 직원들한테 하는 말투로. 남편이 표정 굳는 게 보인다. 그럼 나도 아차 싶지만 이미 늦었다.
나도 회사 얘기 하려다가 관둔다. “투자자가 이런 말을 하더라” 시작하면, 남편 눈에서 ‘또 회사 얘기야’ 하는 게 보인다. 그래서 그냥 입 다문다.
스킨십은 언제 사라졌나
손 잡은 게 언제였지. 기억이 안 난다.
결혼 초에는 소파에 앉아서도 붙어있었다. TV 보면서 남편 다리에 내 다리 올려놓고, 남편은 내 머리 쓰다듬고. 그런 거 있었다.
지금은 소파 양 끝에 앉아서 각자 폰 본다. 아이들이 중간에 앉는다. 물리적으로도 사이가 멀어진다.
침대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서로 끌어안고 잤다. 지금은 각자 끝으로 간다. 나는 왼쪽 끝, 남편은 오른쪽 끝. 가운데는 텅 비어있다.

부부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솔직히 세지도 않는다. 그것도 일정 맞춰서 하는 느낌이다. ‘오늘 아이들 일찍 잤네’ ‘내일 주말이네’ 이런 타이밍에.
로맨틱함 따윈 없다. 의무 같다.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끝나고 나면 각자 폰 보거나 바로 잔다. 뒤끝? 그런 거 없다. ‘수고했어’ 정도?
이게 정상인가 싶다. 10년차 부부가 다 이런가. 근데 여자 CEO 모임에서 비슷한 얘기 나오면, 다들 웃으면서도 좀 슬퍼 보인다.
남편은 뭘 생각할까
남편도 비슷하게 느낄까. 아니면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할까.
얼마 전에 물어봤다. 용기 내서.
“우리… 요즘 좀 멀어진 것 같지 않아?”
남편이 폰에서 눈 떼고 나를 봤다. 잠깐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런가? 바빠서 그런 거 아냐?”
바빠서. 맞다. 우린 바쁘다. 근데 그게 답일까.
“그래도 우리 둘이… 좀 더 애기하고 그러면 안 돼?”
“무슨 애기?”
“그냥… 우리 애기.”
”…”
남편이 멈칫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도 뭘 말하고 싶은지 정확히 몰랐다. 그냥 ‘우리가 멀어진 것 같다’는 느낌만 있었다.
결국 그날도 “바쁘니까 어쩔 수 없지” 이런 결론으로 끝났다. 남편은 다시 폰 봤고, 나도 노트북 열었다.
동료가 되어버린 부부
요즘 느낌이 뭐냐면. 우리가 ‘부부’가 아니라 ‘육아 프로젝트 팀’이 된 것 같다.
공동 목표: 아이들 잘 키우기 역할 분담: 각자 스케줄에 맞춰서 소통 방식: 슬랙처럼 효율적으로 감정: 최소화
실제로 우리 카톡방 이름이 “준호은서 육아방”이다. 남편이랑 단둘이 대화하는 방인데 이름이 아이들 이름이다. 이게 뭔가 싶다.
회사에서 직원들 보면, 우리보다 더 끈끈해 보인다. 점심 먹으면서 서로 고민 상담하고, 힘들 때 격려해주고. 퇴근하면서 “오늘 수고했어요” 진심으로 말하고.
나는 남편한테 “오늘 수고했어” 언제 마지막으로 말했지. 기억이 안 난다.
남편도 나한테 “힘들었지?” 이렇게 안 물어본다. 내가 늦게 들어와도 “회의 어땠어?” 이런 거 안 물어본다. 그냥 “애들 재웠어” 이것만 말한다.
동료보다 못한 관계다. 이게 맞나.
여자 CEO 모임에서 들은 얘기
지난달 여자 CEO 모임에서 비슷한 얘기가 나왔다. 40대 언니가 먼저 꺼냈다.
“나 남편이랑 6개월 동안 손 한 번 안 잡은 것 같아.”
다들 웃었다. 근데 쓸쓸한 웃음이었다.
“우리도 그래요.” “저희도요.” “요즘 남편 얼굴도 제대로 못 봐요.”
비슷한 얘기가 쏟아졌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워킹맘, CEO, 임원. 다들 비슷했다.
한 언니가 이런 말을 했다.
“있잖아. 우리 남편이랑 대화 주제가 아이들이랑 돈밖에 없어. 학원비, 생활비, 노후 준비. 이런 거. 그냥 경제 공동체지, 부부는 아닌 것 같아.”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언니는 이랬다.
“나는 남편한테 회사 일 얘기 안 해. 얘기해도 안 들어. 본인 회사 일도 바쁜데, 내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거지. 이해는 가. 근데… 외로워.”
외롭다.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남편이 있는데 외롭다. 이상한 말 같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
혼자 우는 밤
지난주 새벽 2시. 남편은 코 골면서 자고 있었다.
나는 잠이 안 와서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 결혼식 때 사진을 봤다. 남편이 나를 안고 웃고 있었다. 나도 행복해 보였다.
10년 전 우리는 뭘 기대했을까. 아이 둘 낳고, 각자 커리어 쌓고, 강남에 아파트 사고. 이런 거? 다 이뤘다.
근데 행복하냐고 물으면. 글쎄.
그날 밤 혼자 좀 울었다. 소리 안 나게. 눈물만 주르륵.
슬퍼서라기보단. 뭔가 허무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정작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아서.
아침에 남편이 물었다.
“눈 빨간데. 안 잤어?”
“응. 일 때문에.”
거짓말이었다. 근데 진짜를 말하면 뭐가 달라질까. 남편도 힘든 거 아는데.
다시 부부가 될 수 있을까
요즘 자꾸 드는 생각이 있다. 우리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회사에선 문제 생기면 솔루션 찾는다. 매출 떨어지면 마케팅 바꾸고, 이탈률 높으면 UX 개선하고. 그런데 결혼 생활은? 무슨 솔루션이 있을까.
‘데이트하세요’ 이런 조언 많이 들었다. 실제로 해봤다. 한 달에 한 번, 아이들 친정 맡기고 외출.
첫 번째 데이트. 영화 보고 저녁 먹었다. 좋았다. 그런데 대화가 없었다. 영화관에선 말 못 하고, 식당에선 아이들 얘기만 했다. 끝나고 집 가는 길에 서먹했다.
두 번째 데이트. 전시회 갔다. 작품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 좀 했다. 근데 중간에 남편 전화 왔다. 회사 일. 30분 통화했다. 나도 슬랙 알림 확인했다. 결국 카페에서 각자 노트북 펼쳤다.
세 번째 데이트는 취소했다. 나는 투자자 미팅, 남편은 회식.
데이트가 답이 아닌 것 같다. 시간만 맞춰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작은 시도들
그래도 포기는 하기 싫다. 10년을 같이 살았는데. 아이 둘을 같이 키우는데.
작은 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 하루에 한 번, 아이들 얘기 말고 질문하기 “오늘 점심 뭐 먹었어?” “회의는 어땠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사소하다. 근데 이것도 안 했었다.
- 잘 때 “사랑해” 말하기
첫날 말하려니까 쑥스러웠다. 10년 만에 처음 하는 말 같았다. 남편이 깜짝 놀라면서 “갑자기?” 했다. “그냥.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남편이 잠깐 멈칫하더니 “나도” 라고 했다. 작은 거였지만 뭔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 주말 아침 같이 커피 마시기
아이들 깨기 전, 딱 30분. 둘이서만. 대화 안 해도 된다. 그냥 옆에 있기.
첫 주말에 해봤다. 남편이랑 부엌에 나란히 서서 커피 내렸다. 말은 별로 안 했다. 근데 어깨가 스쳤다. 남편이 내 컵에 우유 따라줬다. 내가 좋아하는 비율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마워.” “뭐가.”
그게 다였다. 근데 좋았다.
변하고 있는 걸까
아직 잘 모르겠다. 우리가 다시 ‘부부’가 될 수 있을지.
근데 작은 변화는 있는 것 같다.
어제 남편이 퇴근하면서 꽃을 사왔다. 작은 다발.
“이거 뭐야?” “그냥. 니가 좋아하는 거.”
프리지아였다. 내가 좋아하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꽃을 받아들고 울컥했다. 몇 년 만에 받아보는 꽃이었다.
“왜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네가 요즘 힘들어 보여서.”
남편이 나를 보고 있었다. 제대로 보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느껴보는 시선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대화를 했다.
회사 일도, 아이들 일도 아닌. 우리 얘기를.
“너 요즘 행복해?” “글쎄. 넌?” “모르겠어. 바빠서.” “나도.”
솔직한 대답이었다. 둘 다 모르겠다는 거. 근데 그게 시작인 것 같다.
아직은 모르겠다
우리가 다시 신혼처럼 될 수 있을까. 아마 아니다. 10년이 흘렀고, 아이가 둘이고, 각자 커리어가 있다.
예전처럼 손잡고 데이트하고, 주말마다 여행 가고, 새벽까지 수다 떨고. 그런 거 불가능하다.
근데 새로운 방식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팀’이 아닌 ‘부부’로 사는 방법.
서로를 업무 파트너가 아닌 사람으로 보는 것.
효율이 아닌 감정으로 대화하는 것.
쉽지 않다. 나도 모르게 “그래서 결론이 뭔데?”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남편도 모르게 “일정 공유해줘”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해볼 거다. 10년을 같이 살았으면 앞으로 10년도 살 거니까.
아이들이 다 크고, 우리 둘만 남았을 때. 서로 처음 보는 사람처럼 어색하긴 싫다.
그때도 손잡고 있고 싶다. 말 안 해도 편한 사이로.
10년 결혼의 무게는 무겁지만, 그만큼 쌓인 것도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는다.
